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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지역
양지면- 대대리
 

  1) 마을개관-----------------------------------------509
  2) 설화---------------------------------------------510
  (1) 제보자 (70,남) 대대리의 유래--------------------510
(2) 송재문 (67,남) 한터 (대대리)의 유래---------------511 
(2) 송재문 (67,남) 말치 고개와 쇠뛴지 고개의 유래-----513 
  ① 말치고개-----------------------------------------514
  ② 쇠뛴지거-----------------------------------------515
 
(2) 송재문 (67,남) 능안에 얽힌 간단한 전설------------516

대대리
가. 마을개관

 박종수, 강현모, 정교현, 지청원 조사 1997. 5. 26.-28.

대대리는 양지리에서 서북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이나, 양지리 쪽에서 가기보다는 용인시에서 주북리를 거쳐 가는 길이 더욱 편리하다. 산간마을인 대대리는 용인터미날에서 버스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으나 버스가 2시간 간격으로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 대대리는 큰 대지가 있다고 한터라고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즉 한은 크다와 넓다는 뜻에서 대를 취하고 터를 의미하는 대(垈)를 취한 명칭이라고 하겠다. 이 대대리는 주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무량동 사기동을 합쳐 대대리라고 하여 내사면에 편입하였다.
대대리를 이루고 있는 자연마을을 보면, 대대는 한터로 위 아래 한터로 구분된다. 당재들은 산제당이 있어 당제를 지내던 들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물건너는 한터 앞에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 있다고 붙여졌고. 중간말은 아래 한터와 웃한터 사이에 있다고 불려지는 마을이다. 운다중은 음달안이라고 하는데 해가 짧은 마을이라고 붙여진 음달안에서 고상한 용어로 바꾸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면난지곡은 골이 깊어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붙여졌는데 일명 미나지골이라고도 한다. 사기동은 사기점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무량동은 사기동 서남쪽에 있는데 평화로운 마을이라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대리의 조사는 1997년 5월 26일과 28일에 정교현 지청원이 조사하였다. 26일 대대 1리의 도착한 순간에 맑은 공기와 높다랗게 펼쳐진 푸른 산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대대 2리를 조사하기 위해 마을회관을 찾았으나 문이 닫혀 있어 마을을 돌아다녔다. 조사자들은 대대 1리의 산 정상에 있는 용화사라는 절을 찾았으나 스님이 몸이 불편하여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조사자들은 비가 오는 28일에 대대리를 다시 찾아 마을회관에서 5명의 할아버지를 모시고 조사하였으나 별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송재문 할아버지를 댁으로 방문하여 조사를 할 수가 있었다.


나. 설 화

1. 대대리의 유래

 제보자1(70, 남)/대대리T 1앞
[2리 마을회관] 박종수, 강현모, 정교현, 지청원 조사 (1997. 5. 28.)

조사자들은 26일에 대대리를 다녀갔으나 조사하지 못해, 비가 오는 28일(수요일)에 다시 찾아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가 오는 날이여서 그런지 밖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기는 힘들었고 다행히 마을회관에서 할아버지 다섯 분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한 분은 80세가 넘으신 분이었고, 나머지 분들은 60~70세 가량 되어 보이는 분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한 분에게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조사자 : 왜 대대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지요?] 대대리는 좋은 터가 하나라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지. 큰 대자 집 터자 그래서 좋은 터라고 하지. [조사자 : 큰집이라는 이야기 입니까?] 큰 집이 아니라 큰 터라는 이야기야.
다른 곳보다도 여기서 저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다른 곳보다 큰 공터가 나오게 돼지. 그곳은 지정학적으로도 좋고 풍수지리설에서 봐도 무척 좋아. 그래서 옛이름은 그냥 큰 터라고 말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대대리라고 불렸지.
 [조사자 : 그럼 대대리에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 좀 말씀해 주셔요.] 특별히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는데, 옛날에 중국 사신이 와서 연각을 지었어. 중국 사신이 왕이 여기까지 쳐들어 왔다가 연각을 지었어.
 [조사자 : 연각이 무엇이죠?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셔요.] 연각은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였어. 옛날에는 소도 잡고 거창했지.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런 행사가 없어졌어. [조사자 : 여기 와서 구룡탑이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구룡탑은 아니고 사기막골(사기를 굽는 곳)이라고 있었지. 사기 굽는 거, 사기를 구워서 먹고 살았지. 그땐 어려웠으니께.


2. 한터(대대리)의 유래

 송재문(67, 남)/대대리T 1앞
[1리 자택] 박종수, 강현모, 정교현, 지청원 조사 (1997. 5. 28.)

조사자들은 마을회관에 계신 할아버지들의 소개로 대대 1리의 살고 있는 송재문 할아버님을 찾으려고 길을 나섰다. 대대 2리에서 대대 1리까지는 긴 아스팔트 포장길로 대략 10여 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마을로 들어서니 집들이 그리 많지 않아 송재문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2층의 큰집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제보자는 학문과 서예에 조예가 매우 깊으신 분으로써 대대리에 관한 전설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한국의 역사와 조상들께서 이루어낸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우리에게는 학점 이상의 지식을 얻은 것 같아 무척이나 기뻤다.

[조사자 : 대대리에 관한 전설을 듣고자 왔습니다.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먼저 여기 대대리의 전설을 알기 전에 명칭부터 알고 시작해야 겠지.
대대리라는 이름은 그게, 여기 집터가 여기 웃마을에서 보면 큰 강물같은 것이 흐르는데, 그 끝에 터 하나가 아주 좋았다구. 그 집터가 크고도 넓고도 좋아. 지금 다른 지역인 대전 한밭이라는 것이 큰 대자가 크다는 뜻도 되고, 하나라는 뜻도 되거든. 그래서 그 한밭이라는 것처럼 여기도 마찬가지였거든 .
한터가 제대로 올바르게 내려와야 하는데, 영구불변으로 그 후손이 잘 살아야 하는데, 한 때 일부 잘 사는 사람들이 외지, 그러니깐 외지라 하면 다른 고장의 땅을 사는 것을 말하거든. 외전(外田) 장만한다고 하거든.
그런 걸 장만해 놓고, 여기 부근에서는 옛날 말로는 남의 것을 줏은 걸 관장하여 받아드리는 것을, 심부름 맡아가지고 있는 책임자가 뭐라고 불르냐 하면은 사음이라고 하거든. 사음이라는 사람이 주인 집에서 장만해 준 집을 가지고, 지주가 해 준 집을 가지고 살다가, 그 집에서 살던 사람은 원래 김해 김씨인데, 그 사람들이 그 한터에서 살았거든. 내가 그 후손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집터가 좋은 관계로 그 집터가 한터라고 불렸거든.
그런데 그 집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중국에서 관운장을 모시던, 한 마디로 종교의식같은 거 믿는게 있으면 좋아 하잖아 왜. 그런데 그것을 전각이라고 하지. 여기 사람들은 전래라고도 했어. 거기를 모실 때는 상당하게 부유하게 잘 살다가, 그 분들이 떠난 후에는 상당히 대접을 안 했어. 제대로 위하지를 않았지. 그 후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손이 그곳에 찾아가 일각문, 그러니까 문이 하나라는 얘기야. 열쇠를 가지고 와서 열려고 했는데 열쇠가 부러져,
“조상님이 노하셨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 그리고 나서 대장장이를 불려 열쇠를 다시하고 그곳을 맡겼다. 근데 그 후로 그 후손이 망했시유. 그 망한 이유를 보면, 어 보통 사람들은 이 후손들이 땅을 다 팔아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가 내려오지.
지금까지는 윗 한터 이야기였거든. 아래 한터도 마찬가지로 여기만큼은 넓고 좋진 않아도, 아래 한터 나름대로 집터로써 손색이 없는 터가 있었어. 그래서 이 고장 전체가 한터, 즉 대대리라는 명칭이 있어. 그런 전설이 있어.


3. 말치 고개와 쇠뛴지 고개의 유래

 송재문(67, 남)/대대리T 1앞
[1리 자택] 박종수, 강현모, 정교현, 지청원 조사 (1997. 5. 28.)

앞의 이야기를 마치고,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이곳의 지명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이 났는지 계속이어서 구술하여 주었다. 앞의 이야기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지명이고, 뒷 이야기는 소가 뛰어간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1) 말치고개
여기 말고도 다른 지역들도 보면 골짜기에 관한 전설이 많잖아. 여기도 몇 개 있는데, 그러니까 여기 고개가 광주로 육로로 걸어서 장보러 다니는 길이었는데. 지금의 버스 길은 저기 저수지 옆으로 돌아가는 거고, 옛날 길은 이 웃마을, 양쪽마을 사이로 돌아 올라갔어.
그 올라가는 길 사이에 조금한 집 하나가 남았는데, 말굽 모양의 한옥 집이야.(조사자 웃음) 그 옆에 주인이 기거하기 위해 지은 조그마한 집이 있는데, 그것만 남고 다 헐렸어. 헛간이고 뭐고. 저쪽에 집 세 개가 있는데, 그 중 한 집이 고개가 넘어가는 지점에 있었거든.
그 길이 뭔고 하니 말치고개라고 하거든. 말이 치뛰었다는 이야기야.(조사자 웃음) 그 말이 어서 나왔냐 하면, 아까 말하던 전각 뒤에 얕으막하게 비산지인데, 그 넘어에다가 북향으로 향하는 묘소 자리가 있는대. 명당이기 때문에 깊이 파면 안 된다고 풍수지리 보는 사람들이 말했는데 욕심에, 옛날에는 한 자가 20센치 정도 됐거든. 지금은 한 자가 30센치이지만.
“얕이 파라.”
고. 했는데 깊이 팥더래. 너무 깊이 파니까, 말 한 마리가 놀라 그냥 뛰어 올라가면서, 언덕을 넘어가면서 고개를 치고 올라갔더래. 그래서 말이 뛰었다 해서 그 언덕을 말치고개가 된거지. 그 고개가 마을과 마을 사이에 난 고개거든. 그런 말이 있고.

2) 쇠뛴지 고개
또 다른 고개를 보면, 그 자리에 공동묘지가 있었거든. 근데 그 묘지와 다른 묘소 사이에서 이상한 것이 올라오드래.
근데 그 묘에 묻힌 사람을 보니, 옛날에 소를 잡는 백정이였데, 근데 그 사람의 힘이 얼마나 좋던지 온 마을 장사들이 그 사람을 붙잡고 당겨도 끄떡하지도 않더래. 근데 그 백정은 소만을 잡는, 그래도 백정 치고는 계급이 높았어. 근데 그 사람이 잡은 소만도 몇 천 마리가 넘었대. 그래서 그 소의 영을 위로코자 제사를 올리고 잡았어.
근데 그 해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 먹을 것도 없었는데, 그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의 딸이 시집을 간다고 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소를 잡는데, 제사를 안 지내고 그냥 잡았데, 근데 희안하게도 그 등치도 좋던 사람이(백정) 갑자기 시름시름 앓고 힘도 못 쓰게 되더니만, 며칠이 되지 않아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죽게 되었다는군.
 그래가지고 그 사람을 그 곳에 묻게 되었잖어.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질 못 했다는군.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등치도 좋고 힘도 장사인 사람이 태어나질 못 했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그 묘에 뭍인 사연이 있었는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그 사람과 그 옆에 묻인 사람 사이에 고개가 있었거든. 근데 거기서 왠 노랑 송아지 한 마리가 이리 뛰어 가더래. 그래서 그 고개 이름이 쇠뛴지여. 쇠뛴지. [조사자 : 쇠띤지요?] 아니. 쇠뛴지. 소가 뛰었다고 쇠뛴지. 소가 뛰어간 자리. 그러니까 그런 지역에 가면 그런 이름이 많어. [조사자 : 참 재미있는 고개 이름이네요?]
옛날에는 그렇게 이름을 붙였어. 그곳의 전설을 붙여서 이름을 지었지. 어렵지도 않고 오랜 세월 전설로 내려오다 보니, 그걸 줄여서 그냥 짧게 부르다 보니 그게 그냥 명칭이 된거야. 요즘처럼 뭐 과학적으로 동이니 리이니 이렇게 하지 않아도, 부르기도 쉽고 자동적으로 전설도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그런 고개 이름을 붙였지. 그러고 보면 옛날 사람들은 참 머리가 좋았가벼.(조사자 웃음)


4. 능안에 얽힌 간단한 전설

 송재문(67, 남)/대대리T 1앞
[1리 자택] 박종수, 강현모, 정교현, 지청원 조사 (1997. 5. 28.)

앞의 이야기를 마치고 생각이 났는지 이곳의 지명에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구술하여 주었다.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텨. [조사자 : 예 그 이야기도 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들어가면서, 능선 안이 무신 이름이 붙어 있냐 허믄 능을 잡을려고 왔는데, 국상이라고 하면은 나랏님 가족은 능을 잡잖여. 능 잡고 그러잖여, 나랏님이나 좀 높이신 분들은.
그래서 능을 잡을려고 왔는데, 그때는 보통 능을 잡으려면 도읍지에서 주먹구구식으로 100리에서 150리 정도 안쪽에다가 많이 잡거든. 모 특별한 규정은 아니더라도, 요즘에도 조금 높으신 분들은 땅 좋다는 곳은 지들 땅이라고 사놓고 그러잖아. 그런 거는 옛날에도 변함없어. 임금님이나 황실에 있는 사람들은 권세가 있어야 하잖아.
“치우라.”
고. 하면 다 내어 주었어. 그런 제도였어. 이런 걸 보면 요즘의 부정부패는 옛부터 내려오는 그런 거 같어. 그러니 이 세상이 혼란하고 복잡하고 검은 돈이 판을 치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봐.
능을 잡으러 오니깐 산세가 괜찮어. 산으로 덮여 있고 물도 있고 공기도 괜찮더래서, ‘나랏님의 능이나 황실 사람들의 능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세히 조사해 보기로 작정했지. 그러고 보니깐, 완전히 파악하고 답사를 해보니깐 능으로는 타당치가 않거든. 그래서 능이 안 잡혔어. 다시 말해서 능으로는 타당치가 않은 터라고 결정이 났거야.
그래서 능이 안 됬다고 해서 능안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됬어.(조사자 웃음) 너무나도 쉬운 이름이지. 능이 안 잡혔다고 해서 능안이니깐.
그리고 뒤능골이라고 있는데, 요거는 이 안에서는 능이 축소된 것같이 조금만게 자리잡고 있거든. 근데 이것도 능의 구실을 제대로 못 혀. 마치 기집이 시집가서 대를 못 잇는 것처럼, 터는 터지만 제대도 된 터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래서 거기는 능이 아니래서 능안이라고 해야 되는데, 똑같이 능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능안의 뒤쪽에 있다고 해서 뒤능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지. 음 알아 듣지?


5. 효자탑에 얽힌 전설

 송재문(67, 남)/대대리T 1앞
[1리 자택] 박종수, 강현모, 정교현, 지청원 조사 (1997. 5. 28.)

앞의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시간이 흘렸다. 조사자와 제보자는 목도 축이고 휴식도 취한 뒤에 조사자가 보았던 효자탑에 대해 묻자 구술하여 준 이야기 있다.

 [조사자 : 여기 대대리에 들어오는 길에 보니 효자탑이 있던데, 그건 뭐죠? 여기 대대리에도 효자가 나서 효자탑을 세웠나 보죠?] 어. 그것도 할 말이 있지. 어느 고장에나 가면 효자 이야기나 누가 이렇게 했다는 이야기는 항상 있어.
왜냐면 어린애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본보기를 보여 줄려고 그러기도 하고, 우리 고장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면서 고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그런 거는 일부러 해주고 그래. 학생들은 그런 거 들어본 적 없어? [조사자 : 저힌 아쉽게도 자라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여. 도시 속에서 살면서 해주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마을의 공동체나 단결같은 것이 없었겠지. 현대의 사람들을 보면 각자 너무 개인주의거든.
하지만 여기 대대리의 효자탑은 정말 자랑할만 하지. 자기네들도 배워서 우리의 효의 사상과 노인들에 대한 공경심을 갖길 바래. [조사자 : 네. 이렇게 나와서 조사하면서 얻어지는 것이 너무도 많은 것 같아요] 이젠 효자비의 관한 이야기를 해 줄게.
그건 옛날 구한말에 나라에서 세운건데, 도로공사 하느냐고 깨트려 가지고 다시 세웠는데 이 효자비의 이름이 효자 김상술이여. 근데 웃긴 건 김상술인데, 여기서 술짜를 잘못 쓰면 구짜로 되거든. 근데 다시 세운 글자에는 술자를 잘못 알고 구짜로 써서 지금은 김상술이 아닌 김상구로 되어 있어. 웃지도 못할 이야기지 모여, 한자를 몰라 효자 김상술을 김상구로 썼으니 말이야.
아뭏튼 그 사람이 어떻게 효자비로 생겼냐 허믄, 고개 넘어 저쪽에 김상술이라는 사람이 살았거든. 원래 그네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면은 그 부인이 무녀, 다시 말해 요즘에 무당이거든, 무당. 옛날에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았지.
근데 무당이면 그 남편은 화랭이라고 하거든. 화랭이란 무녀의 남편을 뜻혀. 그니까 김상술이 화랭인 것이지. 지금 살았으면 한 120에서 130살 정도 되었을 꺼야. 그만큼 오래된 이야기야.
이 화랭이는 무녀들을 도와서 함께 행동하고, 줄타기는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혀서 같이 밥벌이를 하고 살지. 그래서 옛날에 장터 열리면, 부채 들고 외줄타기 하는 거 본적 있을 꺼야. 그런 사람들이 전부 화랑이야.
근데 그 김상술이라는 화랭이의 어머니인가 아버지인가가 돌아가셔서 산소를 써서 묘자리를 쓰는데, 그걸 저 근너편에다가 했어. 근데 묘자리를 썼으면 내려가야 하는데 안 내려간다는 거야, 김상술이라는 분이. 부모님 묘자리를 지키겠다는 이야기이지. 이것이 그때 말로 시묘를 산다는 것이야. 처음 듣지? 그럴 꺼야.
시묘산다는 것은 적어도 한 3년을 묘자리 옆에서 안 내려가고 모하느냐 허면, 그때는 산돼지나 늑대나 와서 묘를 파헤치거나 똥을 싸고 그러거든. 그래서 그런 걸 지키고, 그리고 잡초나 쓸모없는 풀을 정리하는 거지. 그래도 가장 큰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슬픔에 못 이겨 그곳을 지키는 것이 가장 비중이 컸을 꺼야.
시묘를 살면서 눈이나 비가 오니깐, 그 주변에 있던 친구나 가족이 가서 조그마한 움막같은 것을 지워 주었지. 그렇지 않어? 그래야 시묘를 살지 그 속에서. 옷을 입은 채로 수염도 안 깍고, 더군다나 세수며 목욕이며 이런 건 아예 하지도 않았어.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가. 얼마나 어려운 건데. 그리고 손톱이며 발톱도 안 깍았어.
그러면서 오직 자기 부모만을 생각한 거야. 오직 그 산소만을 가꾸고 지키면서 한 3년을 살았어. 엄청난 효지. 요즘 사람들은 그저 자기 자식이나 여편네 밖에 모르지만, 이 분은 그러지 않았어. 그래서 국가에서,
“어디에 사는 누구누구에게 효자비를 세워 줘라.”
이것이 모 자기 입으로 떠버리고 다닌 것이 아니라, 입과 입으로 전해 오면서 나랏님 귀까지 들어가게 된거지.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자기가 시묘를 살면서 보니 바로 자기의 집이 보이거든. 그러니 얼마나 내려가고 싶겄어. 힘들고 배 고플 때는 더 하겠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자기의,
“집을 옮기라.”
고 했어. 대단한 거지. 그래서 집을 옮겼어. 보이지 않으면 더 견디기 쉬울 거 같아서. 아무래도 그래겠지. 그래서 효자비가 생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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