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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閔泳煥)

<묘>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에 있다. 1862년(철동 12년) 7월 25일 서
울 전동에서 민겸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문
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다.
광무 8년(1904) 11월의 노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한양으로 
진주한 일본군은 1905년 11월 소위 을사늑약을 확정시켰다.
이 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황제는 몇 번이나 그를 찾았으나 그때 
그는 선향인 용인에서 두문불출 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동을 알지 못
하고 있었다.
그후 선생은 가평에서 상경한 조병세와 시국을 의논한 끝에 을사늑
약이 무효임을 상소하고 5적대신을 파면하도록 간청하는 한편, 각
국 공관에도 부당한 일본의 처사를 통고하였고 백관을 이끌고 대한
문 밖에 꿇어앉아 연좌농성을 계속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구속하고 울분에 찬 백성들을 강제 해산시키
는 무력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선생은 다시한번 상
소문을 올렸고 죄인임을 자처하고 백관을 인솔, 평리원문밖에서 대
죄하고 있었다.
근신조치가 내려진 후 그는 죄인의 몸이라 하여 집으로 가지 못하
고 가인(家人) 황씨의 처가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 비록 매국 5조약
이 체결되었으나 동지를 이끌고 해외에서 일본의 부당함을 알려 국
제여론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결국 사세는 
이 나라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동년 11월 1일 아침,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슬프도다, 국치와 민욕이 드디어 이에 이르러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멸망하게 되었다.
무릇 살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하여 일어서는 자
는 반드시 살리니 모든 사람이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일사(一死)를 맺음으로서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2천
만 형제에게 사죄하나니 영환은 죽었다해도 죽지 아니하며 여러분
을 구천에서 나와 기필코 도울 것이니 다행히 동포 , 형제는 천만분
려 배가하여 뜻과 기운을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결심유력하여 우
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자 마땅히 명명한 속에서도 즐
겨 웃으리니 슬프다 하여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 2천만 동포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노라
유서를 마친 선생은 각국 공관에 보낸 유서와 함께 조심스럽게 옷깃
을 여미고 늘 소지했던 패도를 꺼내어 목을 찔러 자결하니 때는 을
사 음력 11월 4일 오전 6시였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으며, 시종무관의 관직에 올라 있을 때였다. 
그의 자결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정일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
輔國崇祿大夫) 의정부대신의 관직을 추증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던 선생의 의지는 결국 대세에 눌
려 바로 세울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의 순사보국(殉死輔國)하는 유
법은 애국지사들에게 효시가 되어 조병세, 이병준, 이한응 등이 그 
뒤를 따랐고 구세안민의 민족저항 정신을 뿌리내리게 하였다.

<참고 : 향토문화와 전통, 용인군>,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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