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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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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포(朴苞)

<출생.유래비>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태어난 연도는 확실치 않다.
조선 건국시 대장군으로서의 공이 있어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고, 
태조 7년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지중추원사
가 되었으나, 자기는 논공(論功)에서 2등이 되고, 이무(李茂)는 정
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될 것을 비방하였다가 도리어 죽주(竹
州)에 유배되었으나 얼마후에 소환되었다.
여전히 불만이 남은 그는 다시 제2차 왕자의 난에 간여하였다.
그가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의 집에서 장기를 두는데 마침 우박
이 오며 하늘에 붉은 빛의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나타났다.
그는 방간에게 겨울비가 오고 하늘에 요사한 기운이 있음을 들어 근
신한 것을 청하자 방간이 그 처신 방법을 물었다.
그는 방간에게 군사를 맡지 말며 출입을 삼가고 의관을 정제하여 신
중히 행동하기를 마치 고려조 자손인 여러 왕씨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이라 일렀다.
이에 방간이 그러한 방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차선책을 요구하
자 “주(周)나라가 태왕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아들인 
왕계(王季)에게 왕위를 전할 뜻이 있으므로, 왕계의 두 형인 태백
(泰伯)과 중옹(仲甕)이 형만(荊蠻)으로 도망하던 것과 같이 하는 것
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방간이 또 다른 방책을 요구하자 “정안군(靖安君)은 군사가 
강하여 많은 무리가 붙어 있고, 방간의 군사는 약하며 위태함이 아
침이슬과 같으므로 먼저 선수를 써서 쳐부수는 것이 났다.”고 하였
다.
방간이 이 말을 들어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때 공신중에는 다만 박포
와 장사길(張思吉)만이 따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후일 태종(太宗)
인 방원(芳遠)의 뒤를 쫓았다.
방간의 군사가 크게 패하자 방간은 토산(兎山)으로 귀양을 보내고 
박포는 방간을 꾀어 난을 일으킨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
이 곧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외사면 백암리에 그의 허묘(虛墓)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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