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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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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형(朴元亨)

<출생.묘> 태종 11(1411)~예종(1469) 조선 문신. 본관은 죽산, 자
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병조참의 고(翶)의 아들. 세종 
16(1434)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444년 
사복시판관이 되었고 1453년 게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
와 좌.우승지를 지내고 세조즉위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
(佐翼功臣)에 책록되어 연성부원군(延城府元君)에 봉해졌다.
그는 평소 검소한 것으로 몸을 규율하였고 공명심이 높았다. 55세
가 되던 해인 성종 9년(1466)에 별세하니 수 54세였다. 그가 죽은 
후 문헌공(文憲公)으로 시호가 내렸다.
원형은 특히 사체(事體)에 명달하였고 또한 전고(典故)에 밝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극히 청렴하고 검소하였는데 그의 아들 
안성(安成)이 찬성으로 있을 때 생인을 맞아 술상을 차려 올리니 원
형은 기쁘게 받아 마시고 밤이 깊어지자 안성을 불러 앉히고 시한수
를 지어 주었는데 <今夜燈前酒數巡/汝年三十二靑春/吾家舊物惟淸
白/好把相傳無限人>이라 하였다.
즉 <오늘 밤 등불 앞에 두어 순배 술을 들며/네 나이 헤어보매 서
른 둘 청춘이구나/우리집의 구물은 오직 청백뿐이니/이것을 잘 지
켜서 오래토록 전해다오>하는 뜻이었다.
<사제척언>에는 이 부분을 <집안 잔치에도 유탕한 놀음이 없이 경
계하고 교훈하는 뜻이 있었으니 가치 자제를 가르치는 법도이다>라
고 적고 있다.
세종16년의 알성친시방에는 최항이 장원을 했고 2등(榜眼)은 조석
문, 3등(探花)에는 박원형이 되었고 구치관이 병과(丙科) 3등이 되
었는데 세조때에 와서 이들 네사람이 연달아 정승에 올라 고금에 없
던 일이라 하여 우러러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명나라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중국 사신 진감, 고윤, 장령등이 와
서 등극한 조서를 반포하였다. 이때 원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이들을 맞이하고 교제하기를 능숙하게 하므로 진감이 말하기를 <그
대같은 재주는 춘추시대 태어났더라면 마땅히 숙향(叔向:충추시대 
진나라의 羊舌疹)과 자산(子産:춘추시대 정(鄭)나라 대부 公孫僑)
에 뒤지지 않을것>이라고 극찬하고 이들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전
송을 나가니 진감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옛 사람이 
천리밖의 사람과 정신적으로 사귄 사람도 있는데 나와 귀하는 몇 달
을 두고 함께 사귀었음에랴”하고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연회 석상에서 진감이 연꽃의 그림을 보고 시를 읊었다.

<쌍쌍의 백로는 서로 친한 것 같고/물 위로 나온 연꽃은 참(斬) 연
꽃 같구나/객이 있어 이름이 송성(頌聲)하는 글에까지 퍼지니/연꽃
을 사랑하는 사람이 애련설(愛連說)을 모른다 하겠는가/멀리서 바
라봐도 더위를 잊겠고/나란히 서 있은들 어찌 속진(俗塵)에 물들리
요/그림으로도 이런 뜻을 알겠구나>, 이에 박원형이 차운 하기를
<수향(水鄕)의 화조는 멀어서 친하기 어려운데/붓으로 옮겨오니 교
묘함이 참(생화)를 빼앗았구나/갓 피어오른 연꽃이 말하고자 하고/
한가롭게 서 있는 백로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구나/진흙속에
서 났으나 오히려 깨끗하여 물들지 않았으며/빙설같은 몸매는 멀
리 속진을 벗었구나/옥서(홍문관)에 노는 신선이 보기를 싫어하지 
않음은/맑은 몸매와 향기로운 덕이 닮았기 때문인가>하였다.

진감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며 “동방의 문사는 중국과 다름 없다”
고 경탄하였다.
이렇듯 서로 교우하기를 죽마고우 같이 하면서 이들의 시를 모아 족
자로 만들어서 이별의 선물로 삼았는데 이로써 박원형의 명성은 중
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전한다. 또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왔
을 때 세조가 별궁에서 접견하게 되었는데 박원형이 이들을 접대하
고 교제함이 빈틈이 없음을 보고 좌우의 모든 관원이 박원형은 참으
로 관대를 매고 조정에서 빈객과 이야기할 만한 인물이라고 극찬하
였다.
어느 날 중추부사 어효첨이 입술이 두터웠음을 보고 세조가 희롱하
기를 “어효첨 순후(淳厚)”하였다. 순후는 그의 자(字)로서 순후(滣
厚:입술이 두터움을 이름)와 같은 의미였다. 좌중이 박장대소를 하
고 있을 때 그 중 의정 윤사분(尹士芬)의 볼에 흠이 있는 것을 복 박
원형이 “윤사분 시험(猜險)”하니 시험은 그의 자로서 시험(腮險:볼
에 흉터가 있음을 이름)과 같은 뜻이므로 세조가 또한 크게 웃었다
는 일화가 있다.
그의 묘소는 용인군 외사면 옥산리 하산마을 48번지에 있으며 묘소 
뒤쪽으로는 부친 고의 묘가 있고 아래에는 아들 안성의 묘가 있다. 
묘앞의 신도비는 성화 7년(성종2년 1471) 8월 20일에 세웠다는 기록
이 있다.

<참고 : 한국인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열려실기술, 내
고장 용인>, 이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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