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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입

이미지없음
 송입(宋岦)

<묘> 선조 15년(1582)~현종 8(1667). 조선 무신. 자는 입지(立之), 
본관은 진천(鎭川), 백순(伯純)의 아들. 광해군 8년 무과에 급제하
였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그가 11세 되던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그의 부친 백순이 의병
을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순절하였다. 부친의 시신을 찾아나선 그
는 그의 형과 함께 적에게 잡혀 광에 감금되었으나 밤새 송곳으로 
벽을 뚫고 탈출한 후 마침내 부친의 시신을 찾아 염하고 예로서 장
자를 치루었다. 광해조에서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제수되었는데 새
로 임명되는 관원에 대한 면신례(신고식)가 있어서 신참 관원을 때
리고 곤욕을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수치로 여겨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해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음에도 불응하
자 동료들이 그를 굽히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면신례를 면제하여 주
었다.
광해군 10년(1618),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여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
아오자 그 공로로 절충장군에 올라 오위장(吳衛將)이 되었고 고령
첨사에 이어 덕원부사가 되었다. 인조원년(1623), 이괄(李适)이 평
안병사(平安兵使)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 계(啓)를 올려 자기의 보좌
가 되게 해줄 것을 청하자 그는 병을 청탁하며 그의 수하로 들어 가
는 것을 꺼렸다. 그러자 이괄은 크게 노하여 군율로 다스리겠다고 
억압하자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괄은 마
음속으로 항상 그를 꺼리다가 자산 땅으로 근무지를 지정하여 주면
서 그곳에서 군대의 양식을 조달케 하였는데 마침내 이괄이 난을 일
으키자 자산군수는 송입을 의심하고 그를 죽이려 하매 그는 하는 
수 없이 밤에 말을 타고 성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그는 이괄 
수하의 막장이였음으로 조정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스스로 결백함
을 입증할 방법이 없게 되자 차라리 이괄에게 돌아가 마땅한 방법
을 택하여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 이
괄의 장중을 찾아갔다. 그를 보자 괄은 크게 기뻐하면서 “나의 일
이 성공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는 항상 칼을 차고 다니면서 괄을 
베어버리려 하였으나 그 좌우에는 항상 장수가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괄을 꾀어서 선봉이 되기를 청하고 삼천의 병마
를 이끌고 이른 아침 토산에 이르러 장만(張晩)의 관군 진영에 투항
하였으나 장만은 그를 의심하고 맞아들이려 하지 않자 갑옷을 벗고 
군영 밖에서 통곡을 하자 그제서야 그를 맞아주었다. 그런다음 송입
은 누차 장만에게 역적들이 침경(侵京)치 못하게 하고자 역적을 치
자고 헌책하였으나 장만은 이를 번번히 묵살하매 송입은 그를 힐책
하기를 “원수께선 역적이 임금께 누를 끼치게 하기를 바라는가”라
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장만의 비윌 크게 거스르는 바가 되었
고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책문할 때에 원종공신(등외공신)에 그쳤
다.
광해군 때에 광해군이 총애하는 김씨의 여동생이 첩실로 있었는데 
김씨는 언니의 후광으로 송입을 출세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강력히 
사양하였던 관계로 광해군 말까지 현달하지 못하였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송입을 감리
장(監籬將)을 삼으려 하매 그는 상소를 올려 광해와는 동서간의 혐
의가 있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인조는 전지를 내려 『공은 충의의 
선비이니 내 어찌 의심할 바가 있으리요. 속히 임지에 가도록 하
라』고 하였다. 그는 임지에 이르러 광해군을 너그럽게 보살피며 예
절로 대하니 사대부들의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병자호란때에는 죽
산부사로서 임금을 호종하였고 남한산성을 굳게 방비하였다. 그 공
으로 난이 평정된 후에는 재령군수(載寧郡守)가 되었으며 이때 승
려를 동원하여 장수산성(長壽山城)을 구축하였고 한성부 우윤, 지
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임금께서 춘당대에서 군대를 사열
할 때 그는 81세의 나이로 말 타고 활쏘기를 청한 후 다섯발을 쏘아 
모두 맞추니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송립은 근력이 대단하여 마원
(馬援)에 비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묘소는 원삼면 맹리에 있다.

<참고 : 한국인명대사전, 진천송씨 문헌집>,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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