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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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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여(任玉汝)

항일의병. 양지군 주동면 평촌동(지금의 내사면 평창리)에 거주하
였다. 본명은 경재(景宰), 누대로 무관장(武官將)을 지낸 풍천임씨
의 후예이다.
융희 원년(1907) 위미해가는 정국을 개탄하고 동년 7월, 이천군 신
면(新面), 남정동(南井洞),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주창용(朱昌
龍), 신규희(申奎熙), 조상현(趙常顯) 등과 봉기할 것을 결의하고 
포군 32명을 모집, 의병대를 편제할 때 도총대장(都摠大將)에 이근
풍, 군사(軍師)는 주창용이 되고, 임옥여는 좌익장(左翼將)이 되고 
신규희는 우익장(右翼將), 김봉기는 진찰장(陳察將)이 되었으며, 조
상현은 향관(餉官)이 되었다.
대오를 정비한 이들은 일약 출병하여 광주군 되고개에 이르렀을 때 
도총대장 이근풍이 다른 참모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피살당할까를 
염려하여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김봉기를 대장으로 하여 장두
지(獐頭地:또는 노루목)에서 아침을 먹은 후 일본 기병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하였다. 그 후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던 바, 봉기한 이후 동년 5월 22일 이천읍 우편소
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용인의 굴암사(지금의 묵리 용덕사)
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그 외에도 죽산 백암시장(현, 용인)에서의 교전, 일진회원, 일본 순
검 교상 등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7년 11월 10일 수원 
수비대에 체포되어 당년 36세 나이로 총살형에 처해졌다.(평리원 
재판기록)
일본군이 작성한 폭도사 편집자료의 기록을 보면 그에 관한 활동내
역이 적혀 있다.
- 임옥여:전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 년 36세. 경기도 양지군 주동
면(朱東面) 평촌. 경력불명
융희 원년 8월 중순 경성소요(京城騷擾) 후의 국운(國運)을 분개하
고 동지를 규합하여 이천 창의소(倡義所) 좌장(左將)으로서 횡포를 
극하던 바 8월 21일 이천읍에서 일본기병(숫자 미상)과 교전하여 이
를 격퇴하고 그 여세를 몰아 각처에 웅비(雄飛)하기에 이르렀다.
또 광주(廣州), 양근(楊根) 등을 배회하고 이천읍에 들러 융희원년 
8월 30일 다시 일본군과 접전, 부하 2명의 전사(戰死)를 내고 패주
한 바 있다. 그 후 포군 12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실촌면(實村面)에 
이르러 원주 의병대장(原州義兵隊長)의 군략(軍略)을 사용하여 다
시 포군 70여명을 모집하고 굴암(지금의 이동면 묵리 용덕사)에서 
일군과 접전, 사망자 수명을 내고 둔주(遁走)하였다.
또한 융희원년 9월 14일 포군 1800명을 인솔하고 안성을 습격하였
으나 일본군에 의하여 격퇴당하였다. 그로부터 포군 39명을 인솔하
고 양근군(楊根軍)에 들러 수일동안 체제, 죽산군 원일면(지금의 원
삼면)으로 행진중 고초곡(枯草谷)에서 일본군 병사 및 순사대(巡査
隊)와 교전후 패전하였다. 이때 패병 33명을 용인의 두두마고개 산
위에 집합시켜 무운(武運)이 비색함을 타이르고 한때 해산하였다.
이상의 폭거중 광주 상림(尙林) 도중에서 일진회원(一進會員) 4명, 
백암시장에서 1명, 또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 1명, 순검 1명을 총살
하였고, 또 죽산군에서 순검 1명을 생매장한 일이 있었으며 한때 정
주원(鄭周源)과 함께 횡포를 극한바 융희 원년 11월 자택에서 수비
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죄상을 자백받고 드디어 총살됨.

<참고:의병항쟁사 3권>, 노승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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