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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이미지없음
 이재(李縡)

<출생.묘> 숙종 6년(1680). 용인현 천곡, 지금의 이동면 천리에서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
암(陶菴), 본관은 우봉(牛峯)이다.
일부의 문헌에는 그가 김창협(金昌協)의 문인(門人)이라 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중부(仲父) 만성(晩成)에게서 수학하였을 뿐 김창협의 
문하생이 된 일이 없었다. 8세때에 시(詩)를 지었는데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는 푸른 바다를 생각하고
	나무위에 졸고있는 학은 푸른 섬을 꿈꾸고 있네

라고 하여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주위의 칭송을 들었다.
학문과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24세때인 숙종 28년(1702) 알성문과
에 병과로 급제하여 찬집청기사관(纂輯廳記事官)을 겸하여 <단종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숙종 33(1707)년 봉교(奉敎)로서 문과중
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 옥당에 들었고 1709년
(숙종 35) 헌납, 북평사(北評事)를 지내다가 사가독서 하였다.
숙종 37(1711)년에는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문학(文學)을 겸직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숙종 42년(1716)에는 승지(承旨)로 승진하
여 노론(老論)의 한사람으로서 가례원류(家禮源流)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자 소론을 통박하였다.
가례원류 시비는 가례원류의 발문에서 일어난 노론, 소론간의 당파
싸움으로서 현종 때의 부제학 유계가 금산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가례원류를 썼는데 귀양살이가 풀리자 그의 제자 윤증에게 주어 글
을 가다듬게 하였던 것, 후에 유계의 손자 상기(相基)가 윤증에게 
가례원류 원본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불응하므로 상기는 그 
초본으로 가례원류를 간행하면서 윤증의 소행을 권상하, 정호로 하
여금 발문에 넣게 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소론은 윤증의 편을 
들었고 노론은 윤상기를 옹호하였는데 이재는 노론의 입장에서 이
를 통박하여 결국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였다.
숙종 45년인 1719년 그는 다시 부제학을 거쳐 형조참판, 한성부윤
을 지냈고 이어 균전사로 영남에 내려가 전제의 문란을 들어 시급
한 대책을 진술하였다가 그를 시기하는 대신들의 무고로 관직을 삭
탈당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그는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어 도
승지,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 의정부 좌.우참판을 역임
하였다.
그러나 경종 2년인 1721년 소론의 득세로 관직이 삭탈되었고 이듬
해 노론이 몰락하는 신임사화가 일어남으로서 중부(仲父) 만성(晩
成)이 노론 4대신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그의 노모를 모시고 인제
의 설악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는데에 오로지 전념하였고, 조선
조 후기의 학계에 중추적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재집권하였고 여러 번 소명을 받
은 끝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조정에 나아가 신임사화를 일으킨 조정
의 간흉을 몰아낼 것을 요청하였으나 영조가 탕평책을 들어 그의 주
장을 수용치 않았으며, 정미환국으로 재차 문외충솔(門外黜送)되
자 용인 고향으로 낙향 은거하였다.
여기서 그는 찾아오는 제자들과 저술생활에 몰두하면서 전후 두 차
례에 걸친 은거시절에 50권에 이르는 문집과 주자어류초절(朱子語
類抄節), 근사심원(近思尋源), 오선생휘언(五先生徽言), 검신록(檢
身錄), 주형(宙衡), 서사윤강(書社輪講), 사례편람(四禮便覽)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관직을 받거나 물러날 때마다 난진역퇴의 절조를 보였으며 전
형적 주자학의 유자로서 성리학과 예설에 심오한 조예가 있었던 실
천적 학자였다. 특히 사례편람은 관혼상제 등 예의범절에 관한 저술
로 그 이론적 근거가 명철하고 편찬 규모가 치밀한 것이다.
이 사례편람은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 등 상층가정에 거의 
집집마다 배포되어 예전(禮典)으로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이나 거기 
삽입된 도해(圖解)등은 우리나라 중세의 민족연구에 귀중한 자료
가 되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은 복제와 관련된 친족관계의 법학 내지 
봉건제도하의 사회학적 연구 자료로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
다.
이와 같은 저술은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부터 나온 것
으로 학문적으로는 정암 조광조와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이율곡
의 학문적 주장을 따르고 있었다. 또 이 당시부터 일기 시작한 호락
논쟁(浩洛論爭), 즉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
냐? 하는 상호대립에 있어서(人物性同異論) 그는 낙론을 지지하였
다.
낙론은 금수도 인류와 맟찬가지로 오상, 즉 인.의.예.지.신을 다 가
지고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성(性)이 동일하다고 보는 것을 말한
다.

	「일찌기 천지간에 이(理)와 기(氣)가 있어서 서로 분리
하지도 아니하고,
	 서로 혼잡하지도 아니하나 기가 이(理)보다 승하면 난
하고 이가 기보다
	 승하면 치(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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