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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인

이미지없음
 이중인(李仲仁)

<묘> 고려 충숙왕 2년(1315)~? 고려 말기의 문신.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1인. 태사삼한벽상공신(太師三韓壁上功臣) 이길권(李吉
券)의 후손.
충숙왕 2년 개성의 일청재(一淸齋)에서 부친 광시(光時)와 부부인
(府夫人) 기씨(奇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이
백겸(李伯謙)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중인(仲人)의 흉중에는 진초
(秦楚)의 위엄이 숨어있다”라고 하였음으로 그의 호를 “진초”라 하
였다.
일찍이 큰 포부를 안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덕량(德量)을 길러 일
대종장(一代宗匠:경서에 능하고 글을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어려서
부터 그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으며 당시에 팔현(八賢)이라 일
컫던 이조년(李兆年), 이숭인(李崇仁), 김주(金澍), 이양중(李養中) 
등과 더불어 스승이 되고 벗이 되는 등 교분이 두터웠다.
관위는 통덕랑홍부도감판관(通德郞弘副都監判官)에 이르렀을 때 
여말에 정치가 혼란한 것을 복 개탄한 나머지 관직을 떠나 은거하였
다. 이때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충절을 흠모한 나
머지 추성병의동덕찬화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구성부원군(推
誠秉同德贊化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駒城府院君)을 봉하고 나
라를 위하는 정성과 두 마음을 먹지 않는 의리(義理)를 겸하였음을 
중히 여겨 “나를 도와 서신(庶臣)을 이끌어 달라”고 당부하였으나 
“나는 전조(前朝)의 사람인지라 받아들일 수 없다”하고 말하기를 
“고요하고 소박한 결심이 어찌 변하리요”하고 드디어 두문동(杜門
洞)에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
여 이르기를

	적적한 두문동에 외로운 충의는
	해와 별보다 더 빛나리라.
	봉군(封君)을 사양함은 도리어 작은 일이며
	세상에 떨친 명성은 천추에 빛나리라

라고 하였다.
그가 하세하자 묘는 기흥읍 영덕리 자은교(慈恩橋)에 자리잡고 있
으며, 그의 향사를 받드는 구성재(駒城齋)가 있다.

<참고 : 향토문화와 전통, 용인이씨 세보>, 노승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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