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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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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국(李柱國)

<출생·묘·생가> 숙종 46(1720)~정조 22(1798) 조선 무신(武臣). 자
는 군언(君言), 호는 오백(梧栢), 본관은 전주, 정종대왕 열째아들
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11대손. 부친은 함(涵)이며 모
친은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그는 숙종 경자(1720) 3월 22일 죽산(지금의 원삼면) 문촌장사(文村
庄舍)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나는 날, 부친 함의 꿈에 검은 용
이 대들보 위에 버티고 앉았다가 준마로 변하여 난간 속에 서 있었
음으로 그의 자를 준(駿)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두 살 되던 해 부
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나라면서 기상이 준수하고 위엄이 있
어 사람들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모친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였으나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너
무 슬퍼하는 모양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예를 연마하여 영조 16(1740)년에는 증광과
(增廣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선전관에 등용되었다가 후에 훈련원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1745년에 훈련판관에 임명되어 부정(副正)
의 관위에 올랐다가 영조 23년(1748) 한양부사에 임용되었으나 부
임하기도 전에 조명채(曹命采)의 계청(啓請)으로 금위영낭청(禁衛
營浪廳)으로 일본 통신사를 수행하였다. 주국은 “내 일개의 낭관으
로서 어찌 만리의 역을 피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바다에 떠서 오래
도록 항해하는 것이 남아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마침내 일본
에 들어가니 일본 내 칠치(漆齒)의 무리들이 그의 위엄스런 모습을 
보고 찬탄하면서 열복하였다. 그 후 기사년(영조 25, 1749)에 호조
좌랑이 되었다가 울진현감에 임명되었고 이 기간 중 매우 선치하여 
훈련원정에 발탁되었고 숙종 27(1751)에는 만포첨사와 내금장을 지
낸 후 선천부사를 제수 받았다. 이 기간 중 동림산성(東林山城)을 
쌓아서 국방을 튼튼히 하는 치적을 남겼다. 그 후에 충청도수사(忠
淸道修詞)가 되어 병기를 수리하고 함대를 훈련하였고 교동(喬洞)
에 부임하였으나 임기 중에 아들이 죽어 가솔을 이끌고 하향하여 문
촌장사에 돌아왔다. 숙종 35년(1759)년에 북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비장(裨將)이 기마병을 남발하였다는 무고로 인하여 용인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죽산(지금의 문촌리)에 돌아가 매일 촌 늙은이들과 
함께 장기나 두며 술을 마시고 전원을 벗 삼아 스스로를 즐길 따름
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여러 번 어영, 중군, 금군별장으로 불렀
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정조 7년(1783) 정조대왕의 명으로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할 때 주국
은 아홉 번이나 우승을 하거늘 정조는 그의 뛰어난 무예를 칭찬하면
서 당시의 늠름한 모습을 비유하여 오백당(梧栢堂)이란 당호를 내
렸다. 정조 20년인 1796년 화성의 영능과 장능에 행차할 적에 임금
은 주국의 늙음을 염려하여 다른 사람에게 호종토록 하였으나 주국
은 “신이 한 결 같이 어가를 따르지 못하여 늘 마음속으로 송구함
이 맺혔더니 마땅히 호종하여 성은에 보답코자 한다”고 간청하였으
므로 특별히 윤허하고 주사대장을 제수하였다. 그 후 주국은 군제개
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상소하기를 <군제를 살펴보면 주나라 병농
(兵農)의 제도와 분번(分番)법을 병용하고 있으나 당나라 장정의 예
를 채택하여 임진 이후에 오위(五衛)가 변하여 모든 령이 되었으나 
경성은 팔도의 근본으로서 군대의 수효가 만 명이 채 되지 못하므
로 신이 항상 군제의 소홀함을 염려하였습니다. 일찍이 율곡 이이
의 10만양병설을 생각하여 일찍이 세 번 씩이나 상소한 적이 있으
나 비답을 얻지 못하여 좋은 계책이 무산되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
건대 금(禁), 어(禦) 양 영에 향군상번(鄕軍上番)의 법으로 하나는 
수어(守禦)의 도를 삼으시고, 하나는 조련(操練)의 방법을 삼으셔
서 사람을 따라 지휘호령토록 하며, 군대의 재물과 군사가 없으면 
명을 따를 수 없다 하니 재물을 저축하고 수용하는 것이 실로 군대
가 부강해지는 술책입니다. 또 수영소(水營所)로서 수군을 관장하
는 곳이 산읍(山邑)에 많아 심지어 수영과의 거리가 3~4백리나 되
는 곳이 있으니 배에 능숙하다 할지라도 전연 배를 다루지 못한 즉 
급한 때를 당하여 쓸모가 없으니 무엇에 쓰겠습니까? 신이 생각하
건대 수군이 산읍에 있는 것과 육군이 연해에 있는 것은 서로 바꾸
어 정한다면 편리한 것이 이보다 더 큼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군대 
운영에 따른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코자 하였다. 이에 정조는 비답
을 내려 말하기를 “이 계책을 성취토록 해서 경이 이른 상번(上番)
의 폐단을 제거하고 군포의 설치 등 방략을 시행토록 하라”고 하였
다.
1797년 우상 윤기동(尹耆東)이 주국의 병이 매우 깊었음을 아뢰니 
임금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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