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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열

이미지없음
 이정열(李定烈)

독립지사. 빼앗긴 나라, 주권 없는 백성이 재산은 두어 무엇 하랴! 
일제의 압정 밑에서 2천만 생명이 노예처럼 헐벗고 유리하는데 내 
어찌 호의호식할 수 있으랴.
그래서 조상이 물려준 1천4백석지기 가산을 모두 팔아 상해임시정
부 독립운동기금으로 기탁했던 선생은 3.1운동당시 만세운동에 참
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룬 것이 게기가 되어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
심하였다.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 1900년 출생, 용인군 모현면 초부리에서 거
주하였으며, 그의 장남 이재윤은 전 용인인삼조합장 정운영과 모현
초등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하였고 이 학교에서 함께 졸업한 동기동
창간이기도 하다.
그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강태동(姜泰
東), 최석천(崔錫天)과 접선되어 모현면 일대 2백석을 추수하는 땅
을 팔아 이들에게 건네준 바 있으며, 1921년 5월에는 2만원(백미 
270석)을 가지고 상해로 직접 건너가서 이회영(李會榮), 김규식(金
奎植), 이세영(李世永) 등과 알게 되었다.
그 후 1922년 4월에는 이회영의 지령으로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자
금조달을 위해 은신하던 중, 서울 봉익동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
어 또다시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출옥 후 다시 용인 땅 1백 50석을 
팔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을 비롯, 1924년과 25년 두해에 걸
쳐, 580석 지기의 토지를 팔아 헌납함으로써 당시 김구, 신익희, 이
창숙 등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그 후에도 1929년 5월 나머지 땅 2백석지기까지 몽땅 팔아서 헌납하
고 1930년 귀국, 해방이 될 때까지 평북 구성, 삭주 등지에서 광산
을 위장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에 활약 중인 동지들의 은신처를 제공
하거나 비밀연락을 취하는 본거지로 제공하였다. 말년에는 열 식구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고 초가삼간도 빚에 잡혀 오갈 데 없는 비
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가솔들은 그 많던 재산을 광산업으로 탕
진한 것으로만 알고 적지 않게 원망도 하였다.
해방 후 이시영(李始榮)이 부통령이 되자 선생을 수소문하여 벼슬
에 나오도록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자손들에게 그의 재산을 어떻게 
소비했는지의 사실을 밝혀주는 <인증서> 한통만을 받아들고 돌아
왔다.

<인증서(認證書)>

본적 :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 146번지
주소 : 대전시 은행동 3번지
       이  정  열(李定烈)
       단기 4233년 6월 24일생
위인은 거금 28년 전 대한독립을 위하여 전 가산을 경도(傾倒)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서간도 군사훈련 등 경비를 조달하며, 천진, 북경, 
상해에서 활약하다가 동지와의 회합, 연락 또는 은닉할 장소의 불편
을 느끼고 이북 구성, 삭주, 자성, 벽동 등지에서 표면으로는 광산
을 경영하면서 내면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코자 해방직전까지 
광산을 계속 경영하며 활동한 애국동지임을 인증함.

단기 4285년      월      일
이시영, 김병노, 신익희, 이갑성

이와 같이 막중한 재산을 모두 털어 독립기금으로 바치고 <인증서
> 한통을 유산으로 남긴 이정열 지사는 1963년 3월 1일 대통령 권한
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
았다.

<참고 : 동아일보 1962.10.12자, 독립유공자공훈록, 인증서 사본>,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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