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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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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李耔)

<묘,사당,정자> 조선 중종 때의 명현(名賢). 성종 11(1480)에서 사
간원(司諫院) 예견(禮堅)의 아들로 출생,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
애(陰崖),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한산, 목은 이색의 후예이다.
그의 조부 형증(亨增)은 참판을 역임했는데 청주목사를 지냈으나 
물건 하나도 남에게 받지도 주지도 않는 강직한 선비였다. 그의 부
친 예견 역시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나간지 40여년 동안 청렴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검소하게 살라는 것을 가훈으로 남겼다.
이자는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선영이 있는 용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기곡(器谷)의 두암산 기슭(지금의 기흥읍 지곡리)에서 조
광조, 조광좌, 조광보, 제현과 함께 밭 갈고, 나무하고, 고기 낚으
며, 채소를 기르면서 장수강학지소로 하였고 이들이 회동하던 곳을 
4은정(四隱亭)이라 하였으니 지금도 유적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 14세 되던 해 부친의 임지를 따라 갔다가 두타산(頭陀山) 중대사
(中台寺)에 올라가 송사(宋史)를 읽다가 개연히 분노하여 만언서
(萬言書)를 지어 바치려 했으나 부친이 경계해서 중지시켰다는 일
화를 남기고 있다.
또한 절에 가서는 어느 노승이 계율(戒律)지키기를 매우 엄격히 하
고 말하는 것이 조리가 있으므로 그를 좋아하여 불도에 귀의하려 했
던 일도 있다. 절 앞에 깎은 듯한 절벽이 있었는데 거기 쌓인 눈이 
창가에 비치는 밤에 글을 읽으면서 천고(千古)의 신비에 격앙심취
하기도 했었다고 그의 유년시절을 최고하는 자서전 (음애일록)에
서 밝히고 있다.
서울에 돌아와서 신유년(1501)인 2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
고 갑자년(1504)에 다시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은 우참찬에 이
르렀다. 대간(大諫)이던 부친 예견이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성주목
사(星州牧使)로 좌천되었을 때 이자는 이조좌랑으로서 부친을 봉양
하고자 스스로 자청하여 문소(의성)의 원을 지냈는데, 백성을 잘 다
스리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써,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후에도 그
의 공덕을 생각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1506년 중종이 보위에 오르자 옥당에 뽑혀서 시종(侍從)이 되었으
며, 중종 12(1517)년에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승지 자리로 
옮겼다. 그 이듬해 남곤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상사
(上使)였던 남곤이 북경에서 중병을 얻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것
을 힘써 구호하였다. 이때 함께 갔던 서장관(書狀官) 한충(韓忠)이 
귓속마로 이르기를 「저놈이 사류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요」하
였다. 이에 이자는 정색을 하고 말리면서 힘써 보호하였음으로 생명
을 건졌다.
귀국하였을 때는 계자(階資:등급)를 뛰어 한성판윤 겸 경연관으로 
특진되었으며 이해가 기묘년(중종 14년:1519) 봄이었다. 이때 조광
조는 훈구대신의 위훈을 삭제하는 등 과격정치로 인하여 정가는 크
게 동요되고 민심과 국론이 엇갈렸다. 이때 이자는 정가를 수습하려
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대세가 기울어져서 기묘사화의 와중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조광조 등과 함께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가 최후에 석방되었다. 이것은 사화의 원흉이던 남곤이 명나라에 가
서 병구환 받은 것을 잊지 않았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2
월에 최숙생(崔淑生)과 함꼐 관직을 삭탈당하고 음성 고을의 음애
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음애라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은둔생활이 시작되는데 오직 학문과 독서에 심취하
였고 눈길을 모아 정신을 집중하므로 집안사람도 안면을 볼 때가 드
물었다. 또한 샘물을 연못에 끌어들인 후 모옥의 정자를 짓고 휘파
람을 불며 시조를 읊조려서 흥을 풀고, 술이 생기면 양껏 마셔서 가
슴 속의 음울을 달랬고, 때로는 붓 가는 대로 회포를 적어 시름을 달
랬다. 그러다가 기축년(1529), 인가가 드문 심산유곡을 찾아 이사
를 했는데 그곳은 청추 달천 상류의 토계(兎溪)지였다. 이곳에 정자
를 건립하고 몽암(夢庵)이라 하고 자신의 호도 <몽암> 또는 계몽<
계몽>이라 하였다. 여기서 이자는 탄수 이항(李沆)과 벗 삼고 자주 
왕래하였으므로 이들이 지나는 길목의 새와 물고기도 놀라지 않았
다고 하였다.
이자는 이 부분을 그의 일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만나면 한 돛대로 서로 오가며 돌 위에 앉아 
시를 읊으며 신선의 발자취를 사모하여 냇물에 고기를 낚기도 하고 
한가로운 전원의 틈을 얻어 주인이 되었으니 천리 간에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여기서 일생을 마치니 이해가 중종 28년(1533)이고 수 54세였
다. 그가 하세한지 6년 후에 중종이 기묘년의 일(기묘사화)을 크게 
뉘우쳐서 그때 사화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기용하였다. 만력 
정축(1577)년 부제학이던 유희춘(柳希春)이 주청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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