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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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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수(金忠守)

<충신・출생> 본관은 서흥, 호는 창죽헌(蒼竹軒). 중종 20년(1525) 
양지현 월노동(月老洞)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타고난 풍모가 크고 
우뚝했으며 평소 충과 효를 중하게 여겨 이를 생활신조로 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포의한사(布衣寒士)로 의병을 규합하여 죽산의 
청용산(지금의 용인군 원삼면 옥신리 경계)에 둔적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힘이 다하고 화살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마
침내 적에게 잡히는바 되었다. 그러나 당황하거나 굴하지 않고 오히
려 큰 소리로 왜적을 꾸짖었다.
그때 그의 아들 함(涵)이 사로잡힌 아버지를 구하고자 칼을 휘두르
며 적에게 돌입, 왜적 몇을 격살했으나 잡히는바 되어 같은 날 부자
가 함께 순사(殉死)하니 선조 25년(1592) 임진년 10월 19일의 일이
다.
이로서 아버지는 죽어 충신이 되었고, 아들은 죽음으로 효를 다하였
다. 이때 김충수 나이 44세이고 아들의 나이는 25세였다.
이곳에서 김충수 의병부대에게 일격을 맞은 왜적은 한성(서울)로부
터 동래(부산)에 이르는 전략 노선의 유지와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
하고 <우끼다 히데이에>총수의 산하 좌경진으로 하여금 용인의 수
비를 더욱 강화하였으나 왜적의 사기를 크게 위축시켰다.
숙종 경인년(1700) 그의 증손이 상소로 인하여 충신으로 정려되고 
봉정대부(奉正大夫)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증직되었다.

<참고 : 삼강행실록, 내고장의 얼>, 이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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