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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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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발(李發)

<묘> 중종 39(1544)~선조 22(1589) 조선 문신. 자는 경함(景涵), 호
는 동암(東菴)·북산(北山), 본관은 광주(光州), 제학(提學) 중호(仲
虎)의 아들. 김근공(金謹恭), 민순(閔純)의 문인. 선조 1년(1568) 생
원(生員)이 되고 157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
서(賜家讀書)를 하였고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발탁되었다. 1579
년 응교(應敎), 1581년 전한(典翰), 1583년 부제학(副提學)을 역임
하고 이듬해 대간(大諫)에 이르렀다.
동인(東人)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
여 북인(北人)의 수령이 되었고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
義)를 이념으로 하여 사론(士論)을 지도하였다. 한편 경연관(經筵
官)이 되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하여 기강의 확립에 힘쓰고 
자파(自派)의 등용에 노력하였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화가 미칠 것을 예사하고 대간을 사퇴, 대
죄(待罪)하던 중 체포되어 장살(杖殺)되었다.
이발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았으므로 발
은 옷과 띠를 풀지 않고 약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또 인물 비판하기를 좋아하였고 이조(吏曹)에 오래 있어 인재의 진
퇴(進退)를 자기 책임으로 알고 있었음으로 남의 원망을 많이 샀다.
기축옥사 때에는 혹독한 고문을 받아 온몸의 살이 온전한 곳이 없어
서 숨이 끊어질 뻔 하였으나 다시 국문을 받을 때에는 단정히 꿇어
앉아서 조금도 사색이 변하지 않았다. 마침내 곤장을 맞아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이발이 서울에서 근친하러 돌아가
는 도중에 시를 지었는데

	남쪽 길이 멀고 멀어 새 나는 저 멀리에서 나누어 졌는
데
	서쪽으로 장안을 가르키니 햇가에 구름일세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밤 꿈을 기억하니
	반은 지친이고 반은 성군일세

하였다.
이발은 중후(重厚)하고 엄정하여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척암(惕菴) 김근공(金謹恭)과 습정(習靜)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
웠고 또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다. 학문에 힘을 
써서 홍가신(洪可臣), 허당(許鏜), 박의(朴宜), 윤기신(尹起莘), 김
영일(金榮一), 김우응(金宇顒) 등과 뜻이 맞는 벗이 되어 서로 원대
한 포부를 기약하였다.
알성시에 장원이 되자 명성이 자자하여 곧 이조좌랑이 되어 사론
(士論)을 부식(扶植)하여 조정암(趙靜菴)이 하던 옛 정치를 회복하
려 하여, 경연에 출입하면서 항상 왕도(王道)를 진달(陳達)하고 기
강을 진작(振作)하여 사(邪)·정(正)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소임으로 
여겨 조금도 구차하게 합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우계(牛溪)와 율
곡(栗谷) 두 분과의 교분이 생겨서 서인들이 미워하므로 시사(時事)
에 참여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부제학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인물
의 사·정을 논하고 고향으로 물러갔다.
불행히 사림 중에 역변이 일어나니 발은 자기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조용히 교외(郊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잡혀 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으니 임금이 묻기를 “너는 어찌 벼슬을 하지 않고 
시골에 갔던가?” 하자 발은 “신의 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 급
(汲)이 전하의 은혜로 모친 봉양에 허함을 받아 정원현감이 되었으
므로 아우 길도 이미 올라왔고 신도 역시 올라 왔습니다”라고 대답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너는 네 죄를 아느냐?”고 묻자 대답하기
를 “신은 저의 낯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습니다”하니 임금은 “이미 때
가 늦었다”고 하였다.
이발의 학문과 명성은 실로 후배의 영수가 되었더니 계미년 이후부
터는 사론(邪論)의 주인이 되어 죄상의 실정이 나타나지도 않았는
데도 역적의 옥사에 무겁게 걸렸으므로 일부의 의론은 그를 가엽게 
여겨 마지않았다.
뒤에 김우응, 홍여순(洪汝諄)등이 정철을 귀양 보내고 관직을 삭탈
하면서도 끝내 이발의 신원을 청하지 못하다가 정미년에 한호(韓
浩)등이 비로소 신원을 청하자 임금이 엄하게 책하였고 경술년에
도 삼사(三司)에서 이발의 신원을 청하였으나 역시 광해군이 엄하
게 물리쳤다.
인조반정 후 갑자년에 정철의 신원을 청할 때 영상 이원익(李元翼)
이 이발과 백유양도 아울러 신원(伸冤)해 줄 것을 아뢰었더니 인조
는 이발만 신원토록 하였다. 그의 묘소는 모현면 오산리에 자리잡
고 있다.

<참고 : 한국인명대사전, 연려실기술>,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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