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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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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상(李端相)

<묘> 인조 9년(1628)~현종 10(1669) 조선 문신.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 서호(西浩), 본관은 연안, 대제학(大提學) 명
한(明漢)의 아들. 인조 26(1648)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한 후 이
듬해 정시문과(廷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쳤
고 효종 6년(1655) 사가독서(賜家讀書)하였다. 후에 대간(大諫)을 
거쳐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내고 1658년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 후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 양주에서 학문연구에 힘썼다. 
문하에서는 아들인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
翕), 임영(林泳)등의 쟁쟁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김주항(金奏恒)이 그의 묘지명에 쓰기를 「대개 유능이 서거함으
로 내가 친구가 없는 것을 슬퍼하니,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친구
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음이라. 유능이 홀로 나를 알 뿐이요, 나도 
유능을 아는 것으로 자처하니 어찌 내가 슬프니 아니하리요.」하였
다.
또한 유능이 나면서부터 명망이 일세에 중하여 세상에서 유능을 하
는 자가 처음에는 그 사화(詞華)를 주중(推重)하고 다음은 그 충신
(忠信)을 가상(嘉尙)하고 그 후에는 그 괄태(悎退)함을 높이 여기고 
그 종말에는 진수(進修)하는 독학(篤學)을 숭배하나 그의 입심용력
(立心用力)이 높고 원대한 것은 유능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도 반드
시 다 알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소시(少時)에 시주(詩酒)를 좋아 하였으니 구습을 통절하여 한만
(閒漫)한 음영(吟咏)을 하지 아니하고 사람과 수작하지 아니하면 역
시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외모가 수척하고 몸이 약하였으며, 또 병이 잦아 의복을 감당
치 못할 지경이라도 정신이 혁혁하여 사람에게 비치고 서로 말하면 
음성이 관옥같이 명랑하였다. 평생에 검소하여 재리를 보면 몸이 더
러워질까 하므로 비록 곤박하다고 하여도 변함이 없고 더욱 여색을 
경계하여 암매한 자리에서도 결코 해이하지 않았다.
생전에 사례집람(四禮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
紀), 정관재집(靜觀齋集) 등의 유고를 남겼다.
현종 10년(1669) 기유년 9월에 졸하니 득년 42세이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仁川)의 학산
서원(鶴山書院)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의 묘는 모현면 왕산리에 있고, 김수항이 찬한 신도비가 있다.

<참고 : 한국인물사전, 연이선적고, 묘갈>, 금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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