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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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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엄(尹行儼)

<묘> 자는 경보(敬甫), 호는 수묵당(守黙堂), 본관은 남원(南原). 영
조 임오년(1762) 사마시를 거쳐 여러 차례 도읍을 다스렸고 벼슬은 
목사(牧使)에 그쳤다. 그는 자태가 훌륭하고 정신과 풍채가 찬연하
였다. 총명이 또한 비할 데 없이 뛰어나 그의 글은 관현악에 실릴 만
큼 훌륭하였으며 한번 읽은 것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어두운 밤에 혼자 빈집에 들어갔는데 귀신이 등 뒤에서 왜 
물러가지 않느냐는 소리를 세 번씩이나 외쳤으나 놀래는 기색도 없
이 의연하게 서 있었다.
젊어서 향교에서 공부할 때 송준길(宋俊吉)과 송시열(宋時烈) 두 선
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일찍이 배를 타고 놀이를 할 때 김진상(金鎭商), 이기진(李箕鎭), 민
우수(閔遇洙), 유척기(兪拓基)등을 따라 시문(時文)으로 서로 응수
하며 즐기니 그들은 행엄을 나라 안에서 큰 선비로 허여(許與)하였
다. 갑신년(1764) 영조께서 황단(皇壇:천지에 제사지내던 단)에 제
사지낼 때 특명을 내려 조두(俎豆)를 맡아 제관이 되게 하였고 1766
년에는 관직을 내리고 을미년(1775)에 정5품에 기용되었다. 임금은 
문열공 윤섬(尹暹)의 공훈을 생각하여 통정대부의 위계(位階)에 뛰
어 오르게 하였다. 이때 대신들이 말하기를 윤모는 문학으로는 명성
이 있지만 문과급제한 사람이 아닌데 곧바로 삼품의 위계로 올리는 
것은 국가의 체통에 매우 애석한 일이라 하여 임금은 결국 통정계
(通政階)로 뛰어 오르게 한 명(命)을 거두었다.
임금께서 조적책(糶糴策)을 발표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 보았
다. 이때 근 8조목(八條目)의 대책을 진언(進言)하였는데 그 말이 
수천 언에 이르렀으며 아주 적절하고 그 시대의 폐습을 바로 잡는
데 꼭 알맞았다. 그래서 임금은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여 은총으
로 대우함을 표하였다. 1764년 영조 조에 이르러 성품과 의지가 더
욱 높고 강개하되 언제나 허심탄회하고 한계를 두지 않았다.
한가하게 집에 있을 때나 공청(公廳)에 있을 때에는 기이한 언동은 
없었다. 그는 일찍이 제갈량과 도연명을 흠모하여 그 초상을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시를 보면 때때로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세상을 잘못만나 평정치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지만 높
은 지조와 절개를 세워 드러내려고 하였다. 또 식감(識鑑)을 자부하
여 자신의 뜻에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으면 비록 권위가 있
는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침을 뱉고 돌아보지 않았다.
세상에 아첨하는 무리를 보면 이를 바로 잡아 주고 나쁜 버릇은 씻
어줄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문장을 지을 때는 겉치레 하는 잔재주는 
부리지 않고 한 결 같이 천품대로 하였다.
올바른 운(韻)과 성율(聲律)의 품격은 담담하면서도 호방하고 순박
하여 위나라가 진나라로의 여러 군자들과 견줄만 하지만 기발하고 
고아(古雅)하여 굳건한 기상은 이백과 두보와도 견줄 만 하였다.
시(詩) 칠백편이 있는데 후세인 들에게 법도가 될 만하다. 여러 차
례 큰 고을을 맡아 다스렸으되 정당치 못한 금품으로 누를 만들지 
않았고 도성 서쪽에 있는 고옥(古屋)이 비록 퇴락했지만 수리하지
도 않았다.
산과 물을 좋아하여 말에 안장 얹어 동쪽으로 유람할 때 강원도의 
옛날 예맥 땅에 남아있는 폐허도 돌아보고 금강에 들렀다가 다시 바
닷가를 따라 해 돋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호남에서 영남까지 유람
하고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단군, 기자의 고적을 살펴보고 산수에서 
뱃놀이 하고 묘향산에 올랐다.
일찍이 중국이 오랑캐의 청나라가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누군가가 
의병을 일으켜 북쪽 정벌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방패와 창
을 잡고 앞장서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연경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
면 문득 민심의 향배를 물어보았고 밤이면 천문을 우러러보며 장탄
식을 한지가 오래였다.
1738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백발에 상복을 하고 애통해 함이 좌우
에 있는 사람들마저 감동할 정도였다.
끝내는 이듬해 정월 계유일(26)에 별세하니 남들은 말하기를 칠십 
이세의 고령이기에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런 일은 천고(千
古)를 더듬어 보아도 오직 행엄 뿐이라고 하였다.
그가 임종한 때 말하기를 “어머님의 상도 마치지 못하고 임금님의 
은혜도 보답치 못하였으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
였으나 사사로운 가정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참고 : 대방세가 언행록>,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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