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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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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계(尹棨)

<충신정려문.사당> 선조 16(1583)~인조 14(1636). 조선 문신. 자
는 신백(信白), 호는 신곡(薪谷).임호(林湖), 본관은 남원(南原), 시
호는 충간(忠簡)이며 의인으로 불리웠던 윤섬(尹暹)의 손자이며 삼
학사중 일인인 윤집(尹集)의 형으로 척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인조 
2년(16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
知副正字).전적(典籍),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남양부사(南陽府
使)로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
한산성으로 들어 가려다가 포로가 되었고 난도질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해 12월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수만
의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험천(지금의 수지면 동천리)과 과천에 진
을 치고 있었다.
청병의 척후병 4~5명이 와서 진의 형세가 허약한 것을 엿보고 돌아
간 후 적군이 일시에 돌격해 왔다. 아군은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중
과부적으로 좌우 진영과 중군마저 무너져 내리니 정세규는 겨우 죽
음을 면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남양부사 윤계가 흩어진 군사
를 다시 소집하여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임금을 구하고자 하였
으나 오랑캐에게 항복한 박이치(朴以致)라고 하는 자가 적과 내통
하여 불의에 습격하여 왔음으로 결국 사로잡히는바 되었다. 그는 뜰
아래에 두 개의 기(旗)를 마주 세워 놓고 대청에 팔짱을 끼고 태산
과도 같이 앉아 있었다. 적병이 달려들어 그를 붙잡아 강제로 무릎
을 꿇기를 협박하였으나 그는 적병들을 꾸짖기를 “내 머리는 끊을 
수 있을지언정 무릎은 꿀릴 수 없다”하니 적이 매를 치고 끌고 가
려 하였다. 이에 윤계는 다시 꾸짖기를 “죽어도 네 놈들을 따르지 
않을 것인데 어째서 나를 속히 죽이지 않느냐”고 말하니 적이 더욱 
노하여 함부로 칼을 휘둘러 몸에는 한 점의 살점도 남지 않았으되 
적을 꾸짖는 말은 더욱 끊이지 않았다. 적은 그의 혀를 끊어 버리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가복(家僕)으로 살아남은 자가 이행진(李
行進)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니 행진은 다른 사람을 시켜 그의 
시신을 거두어 염습을 해서 매장하니 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묘
갈에 <슬프다! 공과 같은 분을 두고 하늘이 쓸 만한 인재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세상에 지우(知遇)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미리 위험한 날에 대비할 방책과 공사간에 지치
고 “쇠하여진 경우를 혼자 도맡아 처리하였다고 할 만한데도 재화
(災禍)와 환란(患難)은 박두하고 사세는 급하여 기세는 빼앗기고 힘
은 꺾여 끝내 무(武)를 떨치고 영기를 드날려 흉악한 것을 제거하
고 환란을 구제할 수 없게 되어 다만 자신의 한 몸으로 의리와 분수
를 다해 신명(身命)을 칼날 아래 버려 그 시신을 들판에 나뒹굴게 
하였다. 하지마나 입조하여서는 임금이 그 재능을 알아주는 바 있어
서도 그 기백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도리나 사람의 하는 일
이 어찌 그리 잘못될 수 있으랴”> 하였다.
효종원년에 이행진(李行進)이란 사람이 승지가 되어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윤계에 관한 사실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었더니 임금은 
“나도 역시 들었노라. 옛날 당나라 안고경(顔杲卿)이 적을 꾸짖어 
이르기를 “이 비린내 나는 개 같은 놈들아 어째서 나를 속히 죽이
지 않느냐”하였더니 “윤계도 그러하였다”하시고 다시 한 집안에 세 
사람의 충신(윤섬, 윤계, 윤집)이 난다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라 하
였다. 1645년 충신의 정려문에 내렸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용
원군(龍原君)에 봉해졌다. 그의 위패를 안치한 사당이 구성면 청덕
리에 있고 충신 정려문이 남원윤씨 종가에 함께 전한다.

<참고 : 내고장의 얼(이인영), 대방세가언행록, 연려실기술>, 이응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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