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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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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柳僖)

<출생> 영조 49(1773)~헌종 3(1837). 조선 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유학자이며 음운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
(戒仲), 호는 서파(西陂), 방편자(方便子), 남악(南嶽), 정국공신(靖
國功臣) 유순정(柳順汀)의 11대손이며 부친은 역산(曆算)과 율여
(律呂)에 조예가 깊었던 현감 한규(漢奎)이고 모친은 통덕랑 이창식
(李昌植)의 딸로 경사에 능통하여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한 전
주이씨 사주당(師朱堂)이다.
용인군 모현면 매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지 열달 남짓한 초여
름 방안에서 실을 감기에 열중하던 사주당 이씨가 아들에게 젖먹이
는 것은 깜빡 잊고 있었는데 어린 아들 희가 모친 곁으로 와서 젖을 
찾았다.
그때 무심히 <아가 저기 실 감긴 끄러미를 가져오면 젖을 주마>라
고 하였는데 아기는 놀랍게도 말귀를 알아듣고 실꾸러미를 입에 물
고 모친 이씨 앞으로 기어왔다.
이때부터 집안 식구들은 아기가 가지고 놀던 것이 없어지면 아기에
게 조용히 묻고 했는데 이때마다 잊은 물건을 찾아와서 그 신기함
이 남다른 바 있었다.
어느 날 이씨가 젖을 먹이면서 보던 책 가운데 일자(一字)를 가르키
며 <이것이 한일자>라고 하면서 자리에 누웠다.
이때 유희는 건너방으로 기어나 책상위의 책을 입에 물고와 한일자
를 모조리 짚어 보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나이 11세때에 이르러 부친을 잃었는데 나면서부터 특출하여 
13세에 이미 시부(時賦)를 지으며, 구장산법(九章算法)을 이해하고 
15세에 역리복서(易理卜書)를 꿰뚫었으며 18세때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에 나가지 않고 37세에 충북 단
양으로 옮겨 농사를 짓다가 10년이 지난 48세에 고향인 용인에 돌아
왔으며 이듬해에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53세에 누나의 권유로 과거에 세 번 응시하여 생원시에, 57세에 황
감제(黃柑製)에 3등 3석으로 입격(入格)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는 모친 생전의 훈계에서 「너의 천성이 속류에 합하지 아니하니 
비록 과거에 오르더라도 용납될 수가 없다. 그러니 과거 보다는 명
산에 들어가 너의 천진함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하였음으로 과거
에 나가려 하지 않고 천문에서 조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
이 없을 정도로 그의 학문은 깊이와 넓이를 날로 더해갔다.
특히 경학에 잠심하여 성리학을 주로하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본
으로 삼아 경서의 주석에 전념하였다.
그의 유고로서 방대한 문통(文通) 100권이 초고로 남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행방을 알지 못한다.
그의 학문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종수(種樹), 농정, 풍수, 충어
(蟲魚), 조류 등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그 중에서도 따로 전하는 시
물명고(時物名考) 물명유고(物名類考) 언문지(彦文志)는 국어학적 
시료로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찍이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를 직접 사사하여 
당대의 문자 음운학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30세 전후에 저술
한 <언문지>의 원고를 분실하고 20여년이 지난 1824년 52세에 다
시 저술한 것이 지금에 전한다.
이 책은 그가 이생을 통하여 할 수 있는 학문연구에서 가장 원숙한 
경지에 들어갔을 때 지은 것이므로 그의 해박한 학식과 연구는 다
른 사람이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을 파헤친 것이었다.
한편 그의 <물명유고>는 당시의 다양한 국어어휘 7천여 물명을 수
록하여 해박하게 주석한 물보류(物譜類)로서 그 주석에 쓰인 우리 
어휘는 무려 1,600이 넘는다.
<물명유고<는 그 섬세한 기술과 희귀한 어휘 등으로 보아 가히 그
의 대표적 저술로 손꼽을 수 있으며, 이로써 그를 어휘학자로 평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 : 한국인명대사전, 김홍식 국사대사전, 향토문화와전통(용인
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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