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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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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저(金 儲)

<묘> 중종 7(1512)~명종(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
는 학광(學光), 부친은 이조참판 세필(世弼)이다.
중종 34(1539)년 유학으로서 별시문고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뒤 검
열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동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
를 진휼하였고 인조 초기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 지평이 되었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
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관직을 삭탈당
하고 가산과 처자도 적물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그가 귀양을 떠날 때 어머니 이씨는 동문까지 나와서 끌어안고 통곡
했는데 저가 하직하고 말에 오른 뒤에도 모친이 울부짖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며칠 동안 길을 가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옷자락을 뿌리치
고 통곡을 하면서 갔으니, 옛사람들이 옷자락을 끊어버린 사실과 비
슷하다 하겠으며 아마도 꼭 죽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둘째 형인 참봉 구에게 영결하는 글을 지어서 보냈는데 글의 
내용은 이렇다.
<병오년 8월 10일 아우는 형님과 멀리 하직합니다. 서쪽과 남쪽은 
천리 길이어서 양쪽이 모두 연락할 길이 없으니 생사 간에 뒷일을 
부탁해야 되겠습니다. 장가든지 벌써 스물 두해인데도 자식이라고
는 남녀 간에 하나도 없으니 외로운 몸입니다.
형님은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쓸만하온데 둘째가 벌써 자랐기로 속으
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물거리며 아직까지 결정을 짓지 못
하였음은 아직도 후일에 희망을 걸었던 때문입니다.
둘째로 나의 양자를 삼아 달라는 것이 떠나는 심정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은 아니고 벌써부터 마음속에 정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죽을지 살지, 또는 오래 갈지 곧 오게 될지 모르오니 이 글을 
두고 나 본 듯이 여기소서. 갈 기이 바뻐 여러 말 할 수 없고 글도 제
대로 되지 아니하여 몽당붓끝 가는대로 써 올립니다. 떠나는 아우 
저.>라 하였다.
일찍이 저가 밤중에 유인숙에 갔을 때 패랭이 쓴 자 두어 놈이 얘기
하는 것을 엿듣고 있더니 그 때문에 죄를 입었는데 죄가 왕실에 관
한 것이니 나식(羅湜)과 다름없다며 사사(賜死)하였는데 삼사(三
司)의 소관을 사사한 것은 예로부터 없던 바였다.
그를 사사하였을 때에 모부인(母夫人)이 그의 부친 세필(世弼)이 기
묘사화 때 옥중에서 입던 피 묻은 옷을 가지고 와서 통곡하며 말하
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이 계셨기 때
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10여살이
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
고 하였다.
선조 초년 정오년(1570)에 직첩을 도로 주고 적몰되었던 것을 풀어
주었으며 이조판서로 추증하는 한편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내렸
으며 양자 여경(餘慶)에게 전설별제(典設別提)의 관직을 내렸으나 
사은(謝恩)만 하고 일생동안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묘소는 수지면 죽전리 대지마을 산록으로 부친 세필의 묘하에 
전하고 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열려실기술, 십청헌집>,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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