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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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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윤겸(吳允謙)

<묘> 경기도 기념물 제104호. 모현면 오산리. 조선 문신, 자는 여익
(汝益), 호는 추탄(秋灘)또는 토당(土塘)이라 했으며 본관은 해주,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아들로 명종 14(1559) 10월 12일 
한성 숭교방(崇敎坊:현 종로구 명륜동)에서 출생했다.
모친인 이씨가 선생을 잉태했을 때 이곳 현아(縣衙)의 남쪽 작은 봉
우리에 삼태성(三台星)이 내려졌다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
다. 또 당시 문천의 현령이던 외조부는 <이 아이는 삼태성의 정기
를 타고 내어날 것인즉 반드시 정승자리에 오르리라>고 말하였다. 
그 후 모친의 꿈에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았으므로 초명을 성
룡(星龍)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8세 되던 해인 명종 21년(1566)에는 병중이던 모친이 유자
(由子)를 먹고 싶어 하심을 보고 이웃 고을 이상사(上舍:생원이나 
진사)댁에 유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달려가 간곡히 유자를 청
하자 이 상사는 어린 아이의 갸륵한 마음씨를 기특하게 여겨 유자 
몇 알을 선뜻 내어 주었다.
15세 때인 선조 6년(1573)에는 외삼촌을 따라 용인에 내려와서 시전
(詩典)을 읽었으며 22세 되던 해인 선조 13년(1580) 군기시(軍器
寺) 이응화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3세 때 우계(성혼)의 문
하생이 되었으며 선조 15년(158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음보(陰補)
로 영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선조 22년(1589) 전강
에서 장원하여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등을 역임하였고 1592년 임
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발
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선조 35년
(1600) 스승 우계가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였을 때 이를 적극 변
론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6~7년간 안주목사로 있으면서 안주성을 축조하기도 하였으
며,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 시정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2년(1610) 비로소 내직에 돌아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
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 이언적과 이황의 문
묘종사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했다가 왕의 뜻을 거스른
바 되어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아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한편으로는 영월에 있
는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각 고을로 부터의 제수마련 법식을 제정
하여 이를 준용케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첨지중추부사가 되
었으나 집권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구실로 광주목사를 자원하였다. 광해군 
9년(1617)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 정사로서 일본에 건
너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150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으
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정상화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북인
들에 의하여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여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하 토당(土塘)(현:모현면 오산리)에 물러나 있다가 광해 
14(1622)년에 용인현의 기곡촌(현,기흥)으로 옮겨 거처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신종황제가 죽고 희종이 즉위하여 이를 축하하
는 사절을 보내게 되었을 때 하극사(賀極使)가 되어 바다를 건너 명
나라로 향하였으니 이때가 4월 초 3일이었다. 8월에 북경을 떠나 등
주에 와서 다시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도중에 석성도에 이르
렀을 때 풍랑을 만나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지경에 처했을 때 선생
은 조복을 갈아입고 칙서를 품속에 간직한 다음 <한번 죽음은 이미 
정해진 일/이에 이르러 또 무엇을 의심하랴>면서 죽음을 기다렸
다. 그러자 곧 풍랑이 멎어 일행이 무사히 귀국하였다. 인조 2년
(1624)에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고 1626
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랑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과 중전을 봉행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환도 뒤에 좌
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니 이때 나이 70세였다.
이때 노사.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의 전념을 촉구
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행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
숭하고 또 부묘(府廟)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의 반대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었다. 78
세인 인조 14년(1636) 인렬왕후(仁祖妃)의 총호사(摠護使)로 과로
한 나머지 득병하자 임금께서는 승지를 보내시고 하루에 세 번씩 환
관을 보내어 문병하니 이 또한 전례에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즈음 
선생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거룩한 임금을 만났으나 세상
을 바른길로 이끌지 못했으니 몸에는 덕이 없고 나라에 대해서는 공
로가 없다. 무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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