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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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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일(吳道一)

<출생.영정> 인조 23(1645)~숙종 29(1703)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
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영의전 윤겸의 
손자. 종친부 전참(典懺) 달천(達天)의 아들. 현종 14(1673)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숙종 6년(1680) 부수찬, 지제교(知製敎)를 거
쳐 1687년 승지가 되었다. 1700년 대제학,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
고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세칭 동인삼학사
(東人三學士)라 칭하였으며 애주가로도 유명하였다.
특히 지조가 곧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타계하였을 때 
숙종대왕은 사제문(賜祭文)에서 <지조는 빙벽(氷壁)보다 기운차다 
계수나무는 늙을수록 더욱 맵고, 난초는 죽어도 오히려 꽃답다>고 
하여 그의 성격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고결하고 추상같은 성격과 풍채를 가졌음에도 일면 호탕
하고 소박한 운치가 깃들어 있음이 그의 한 싯귀에서 찾아볼 수 있
다.

	봄이 와도 봄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병이 봄과 함께 더해가 벼개에 엎드려 있는 것이 잦으네
	오늘 우연히 촌 늙은이를 이끌고 나오니
	들꽃과 강 버들이 십분이나 봄이로세

라고 하여 봄 기분에 절로 젖어드는 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자품은 총명하여 말을 배우기도 전에 글자를 해득하였다고 하
며 4~5세에 시를 지어 사람들이 경탄하였다고 한다. 그가 네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성강(星江) 조견소(趙見素)를 쫓아 글을 배웠는데 스승이 아
직 등과치 않은 포의한사로 있음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동문서생들
이 스승을 천거하여 유학생들을 교도하는 직책에 임명해 주기를 예
조에 청하였다. 이때 남선(南銑)이 예조판서로 있었는데 이 글을 받
아보고 의아히 여겨 묻기를 “이것은 너희들의 글이 아니다. 누가 대
신 써 주었느냐?”고 물었다. “도일이 나서서 이것은 소생이 지은 것
입니다.”라고 말하였으나 판서는 믿지 않고 “그러면 이 앞에 나와
서 그 글을 한번 읽어 보아라”하니 그는 그 글을 읽고 나서 “대감께
서는 어찌 그리 의심이 많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이 말에 남판서를 
깜짝 놀라면서 “이런 아이를 가르치고 있으니 그 스승을 짐작할 수 
있다”하고 그의 스승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하였다. 그의 학
문과 덕행으로 숙종과 지우(知遇)가 깊었는데 오도일 역시 성의를 
기울여 충실히 임금을 보좌하고 나라 일에 힘을 다하였다. 그는 오
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으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는데 또
한 장문의 소(疎)를 올려서 왕자(王者)의 할 일과 정치의 요체를 진
언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라를 근시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또 성품이 지나치게 강직하여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음으로 정적이
나 소인배의 무함을 받아 파란을 겪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기강을 바
로 잡아서 세도(世道)에 기여한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럴 때
마다 그는 소를 올려 사직코자 하였으나 숙종은 “신하를 아는 자는 
임금만 한 이가 없다”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 동안 항상 청렴결백을 신조로 하여 봉직하였고 외직에 나
아가서는 먼저 백성의 폐단이 되는 것을 제거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
를 베풀었고 백성을 교화하고 선도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 마다 선정을 기리는 칭송이 높았는데 심지어 울진 같은 곳
에서는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제사를 받들기까지 하였다는 일화
를 남기고 있다. 그는 또 문관을 전선(銓選)하는 이조참판의 중직
과 무관을 골라 뽑는 병조판서의 직책에 있었으나 언제나 인물본위
로 사람을 임명하여 인사에 공정을 기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원로대
신을 지냈거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의 청탁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
지 않았으며 또한 정리(情理)에 넘치는 물건은 일호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문전은 마치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다. 때문에 30
여년을 관직에 몸담았으나 집 한 칸, 땅 한 두럭이 없으므로 이를 두
고 청백리의 표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업동(業同)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에 옥사를 다스리던 대신
(大臣) 남구만(南九萬)의 일을 무사하게 만들려는 생각으로 그에게 
동조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고 숙종 28년 임천(林川)으로 귀양 갔다
가 다시 장성으로 옮겨진 후 숙종 29년(1703) 2월 초4일 적소에서 
임종하였다.
생전에 술을 너무 좋아해서 그의 인물을 아끼던 숙종의 간곡한 타이
름으로 한 때 술을 끊은 적도 있었으나 사헌부의 관리가 와서 장성
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고 귀뜸을 해주자 그는 거기도 술이 있느냐
고 물었다. 이에 관리가 술이 어딘들 없겠느냐고 하자 술이 있는 곳
이면 어디건 다 좋다라고 하였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장성에 적
거(謫居)한지 1년도 채 못 되었는데 그동안에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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