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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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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수(金自粹)

<유래>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본
관은 경주이다. 본래 안동태생으로 고향에 효자비가 있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장원하여 덕령부주부(德寧府主簿)가 되
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경상도 도순문사(都巡
問使) 조민수(趙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하여 왕으로부터 회교(回
敎)를 내리는 글(答信)을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김자수는 조
미수가 전날 김해에 침입한 왜구를 겁내어 많은 사졸을 죽게 하였
고 또 패하여 달아났던 사실을 들어 왕의 명령을 거절하였다.
그는 왕명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으로 유배되었으나 후에 다시 
등용되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 이
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大司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등극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나 전부터 그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던 이태조
가 그를 불러 대사헌(大司憲)에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칭하고 누워있으면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후에 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형조판서로 등용코자 하여 
그를 불렀다.
조정관원으로부터 이의 전갈을 받은 그는 곧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
고 자기집 사당으로 나아가 조상에게 절하며 엎드려 영결(永訣)을 
고하고 나서 그의 아들을 불렀다.
「듣거라, 지금 곧 내 수의 한 벌을 장만하고 관을 준비하되 일이 끝
나면 곧 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의 아들은 부친이 분부한 대로 관곽과 수의 
한 벌을 급히 마련한 후 준비되었다고 고하자 그날로 길을 떠나 용
인경계인 광주 추령에 이르자 그는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바로 이 땅이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로서도 오히려 두 지아
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남의 신하(고려)가 되어 어찌 두성
(조선)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느냐?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나 죽은 후에 너는 반드시 이 부근에 나
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고 
말한 후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에 와서 그 누
가 알리 있으리요>라는 절명사(絶名飼) 두 구절을 남기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려실기술에 기록되기를 선생이 자결한 추령은 포은 정몽주를 장
사한 땅이라 하였으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추령이 광주부로부터 남
쪽 50리지점이라 기록되었고 남한지(남한지)에는 오포면의 용인 경
계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선생의 묘가 실존하는지는 확인되지 않
고 있다.

<참고 : 한국인명대사전, 열려실기술>,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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