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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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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석(趙榮祏)

<출생> 숙종 12(1686)~영조 37(1761) 조선 후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 석계산인(石溪山人), 
본관은 함안, 이희조(李喜朝)의 문인, 겸재(謙齋) 정선(鄭선), 현재
(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3재(三齋)로 불리워진다.
숙종 12년 2월 14일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지낸 해(楷)의 아들중(榮
福,榮祿,榮禔,榮祏) 막내아들로 출생, 영조 37년인 1761년 3월 27일 
76세를 일기로 타계한 인물이다.
28세 때인 1713년 진사가 되었고 37세 때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
으로 있을 때 그의 백형 이지당(二知堂) 영석이 임인사화(壬寅士禍)
에 연루되어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후 40세 
때인 1725년 공릉직장(恭陵直長)으로 시작하여 연기, 적성, 의령현
감 등 외관직을 두루 거쳤고 후에 정4품인 광흥창수에 이미 통정대
부(通政大夫)로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그는 성격이 
매우 강직하고 기가 밝으며 뜻은 높고 행동은 잘 가다듬어져 있으
며 크고 작은 일에 척도가 근엄하고 관청이나 집에 거처함에 있어 
스스로 부응할 규모(規模)를 가지고 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부모
를 여읜 그는 형과 누님을 부모처럼 섬겼으며 아들과 조카들을 교육
함에 있어서는 매우 엄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네 가
지 큰 욕심이 있으니 그것은 <생(生), 색(色), 관(官), 재(財)로 누구
나 이것을 경계해야 하지만 벼슬하는 사람은 더욱 명심해야 한다>
고 말해 그의 묘지명(墓地銘)을 쓴 유척기(兪拓基)가 관직생활 30
년 동안 늘 이것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의 모습은 고죽(孤竹)과 같
았고 절조(節操)는 돌처럼 단단했으며 아의(雅意)를 임천(林泉)에 
두어 영리에 급급하지 않았으며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티끌하
나 없이 청소를 하고 책상위의 책들은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했던 깔
끔한 성격을 가졌다. 그가 50세 때인 영조 11년(1735)에 광해군과 
세조어용을 중모(重摹)할 때 그가 화법을 이해하므로 왕이 그를 불
렀으나 당시 의령현감으로 있던 그는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화사
(畵師)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부름에 가지 않는 것은 예부터 의
(義)이다」 라면서 일개의 현령이 조정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영조 24년 숙종의 어진(御眞)을 중모(重摹)할 
때 입참감동(入參監董)의 명을 받고 응하였으나 처음의 소명(召命)
과는 달리 또다시 집필(執筆)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때에도 
“오늘의 일이 을묘년 때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죽기를 무릅쓰고 사양
하면서 “예경(禮經)에도 선비가 더불어 할 일이 아니라 되어 있으
며 신(臣)이 비록 미천한 신분이오나 스스로 여러 화사(畵師)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의관을 욕되게 하겠느냐?”고 주장하면서 정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고집은 왕의 노여움과 조정 중신
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종국에는 영조의 이해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인물, 산수, 화조, 영모(翎毛), 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으
며, 인물에 뛰어나 왕의 어진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고 또 한사코 이
를 거절했으나 스승 이희조와 형 조영복의 초상을 그렸던 것으로 전
해오는데 안성군 고삼면 가유리 증손집에 이지당 초상 1점이 전해
지고 있으며 이것이 그가 남긴 현존하는 유일한 인물화인 것으로 전
해진다.
홍의영(洪儀泳)의 관아재화첩 발문에 “본래 인물에 뛰어났으며 겸
하여 산수도 잘하였고 금강산을 다녀온 뒤 화경(畵境)이 더욱 진보
되어 명작을 많이 냈으며 또한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하였
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백악
산(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정선, 시인인 이병연(李秉淵)과 이웃이 
되어 교우하면서 시화(詩畵)를 논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윤두서(尹斗緖)의 경우처럼 조선 중기의 전통
화법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약간 가미한 화풍을 특징
으로 한다(민족문화백과사전)고 하였다. 이러한 회화세계는 이인상
(李麟祥) 등에게 얼마간 영향을 미치는 등 조선후기 문인화의 전개
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가 생전에 인왕산록에 거주하였으나 용인의 인물로 지목되는 것
은 그의 형 이지당 조영복이 용인(옛 양지:지금의 안성군 고삼면 가
유리로 편입) 사람인 것으로 용인군지 등에 밝혀져 있고, 경기인물
지(경기도)에 안성사람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안성으
로 편입된 고삼면은 1965년 안성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그가 출생 
당시인 숙종 연간에는 이 지역에 양지에 속했으며, 본 인물지 수록
대상은 고금을 통털은 역사적 인물을 정리하는 것이므로 용인사람
으로 기술코자 한다. 현재 그의 묘소는 파주군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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