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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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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원(鄭周源)

항일의병.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하사리(현재의 용인군 원삼면 하
사리)에 거주하였다. 농사를 업으로 하여 살던 양민이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정책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융희 원년(1907) 9
월에 죽산(지금의 원삼)에서 봉기한 후 융희 2년(1908) 5월까지 부
하 수백 명을 이끌고 죽산, 양지, 수원, 안성, 당진, 해미, 면천 등지
를 누비면서 일본 수비대와 수회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정주원은 당초 창의군(倡義軍)을 모집하여 활동하던 의병장 서용범
(徐用凡)으로부터 현 정세의 흐름을 듣고 더욱 분개하여 그는 기울
어져가는 정세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즉시 청장년들을 모
집, 그 휘하에 150~200명의 의병이 가담하였다. 정주원은 이들을 
이끌고 각종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29일 경기지
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24일 경성공소에 항
소하여 종신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그에 관한 의병활동 경력에 관한 내용은 일본 경찰이 작성한 소위 
폭도사 편집 자료에 기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
과 같다.
「융희원년(隆熙元年) 8월(일자미상), 자진(自進)하여 의병에 투신
하고, 당시 용인군 굴암(지금의 용덕사)에 있는 지방 무뢰의 도배
를 이끌고 양지(陽智), 양성(陽城)군을 배회하여 도당(徒堂)의 모집
에 힘써 150여명의 당여(堂與)를 얻고 총기, 탄약의 준비 또한 갖추
어짐으로서 스스로 의병대장(義兵隊長)이 되어 부서를 정하고 거병
(擧兵)하기에 이르렀다.
또 8월 25일 안성에서 있었던 의병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부하를 
거느리고 안성시(安城市)에 이르렀다. 이때 수괴(首魁) 7명, 부하 1
만 명이 모였다 한다. 그러하여 목적한 회의는 각자 의견이 불일치
한 결과 마침내 아무런 의결을 얻지 못하고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집회(集會)의 다음날인 29일 새벽 일본군 40여명의 습격을 받고 교
전(交戰)하였으나 잠시 후에 궤란패주(潰亂敗走)하였다.
9일 이후 죽산(竹山), 양지(陽智) 양군을 배회, 어리석은 인민을 선
동하자 부하로 투신하여 오는 자가 날로 더하여, 한때 9백여 명에 
달하였고 이를 3대로 나누어 그중 1대는 정주원 자신이 인솔하고 수
원군(水原郡) 수하(水下) 방면에 출동하여 겁탈을 함부로 하였으
며, 나머지 2대(二隊)는 그 부하에게 인솔케 하여 양지(陽智), 죽산
(竹山)의 경계에 배치하여 도량(跳梁)이 극단에 달하였다. 11월(일
자미상)에는 한진(漢津)에서 배를 타고 고온포(古溫浦)에 건너가 
충청도의 당진(唐津), 풍도(豊島), 면천(沔川), 서산(瑞山)의 각 군
을 배회하였다.
또한 융희 2년(1908) 2월, 재차 안성, 양지, 죽산 등지에 출몰하고 
죽산군 능촌(陵村)에서 일본군 16명과 교전하는데 매우 힘을 기울
였고, 융희 2년 4월 양지군의 사동(寺洞)에서 수효미상의 일본군과 
접전한 바 있다. 그리고 4월(일자미상)에는 용인군 요봉골(料鳳谷)
에서 수요미상의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부상자 1명을 냈다.
그 후 융희 2년 4월 25일에는 다시 충청도 당진군(唐津郡)에 건너
가 2달 회시(晦時)의 불가불길(不可不吉)함을 알고 한때 부하를 해
산하였다.
그 후 융희 2년 7월 19일 오전 8시경, 충청도 해미군(海美郡) 적서촌
(赤鼠村)에서 2척의 선박이 입항할 때에 신호를 잘못하여 일본군에
게 육박되어 달아날 길을 잃고 궁지에 몰림으로써 스스로 의병장 정
주원임을 밝히고 포박 당하였다.

<참고:독립운동사별책(1), 재판기록, 의병항쟁사(3), 독립유공자공
훈록(국가보훈처)>, 금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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