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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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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복(丁胤福)

<묘> 중종 39(1544)~선조 25(1592) 조선 문신. 자는 개석(介錫), 본
관은 나주(羅州), 응두(應斗)의 아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힘
을 들이지 않고 학예를 성취하여 명종 22(1567)년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문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예
조 낭관(郎官)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등용(登用)과 발탁(拔擢)이 날
로 더하여져서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헌납, 홍문관 수찬, 교
리 응교, 사헌부 지평, 장령, 집의를 역임하고 갑신년(1584)에는 승
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 후 국자감(國子監)과 
사간원의 장을 역임하고 이조, 병조참의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었
다. 선조 22년(1589) 겨울, 호남에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모함하는 말이 진신(搢紳)에까지 퍼지고 한때 사류가 다 
배척을 당하는 가운데 그는 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그의 억울함을 알게 된 임금은 그를 다시 서용(叙用)하려 
했으나 그를 배척하는 무리들이 계속 모함하므로 칩거, 은둔한 것
이 수년이었다.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서로호소
사(東西路號召使)로 기용되었는데 왕은 의주로 서순 중이었다. 그
때 그는 미끄러져 부상한 것이 병이 되어 점점 악화되었으므로 임금
을 호종(扈從)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병든 몸을 수레에 실려 여러 
낮 밤을 가다가 서흥에 이르렀을 때 적의 군세(軍勢)가 뒤를 추격하
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국은을 입어 교목세신(喬木世臣)이 되었
는데 하루아침에 군부(君父)의 피난하심을 보고도 어전을 모시지 
못했음을 황망히 여기고 통곡하였다. 그의 병세는 이미 짙어져서 스
스로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고, 가산군(嘉山郡)에 이르러서 드디어 
별세하니 그해 10월 10일이었으며, 향년 49세였다.
임시로 그곳 군에 매장하였다가 적이 조금 물러간 후에 백천(白川)
땅에 이장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포곡 묘향(卯向)에 이장하였으
니 지금의 포곡면 전대리 가마실 마을이다.
그의 자품(資稟)은 순수하고 뜻과 행실이 독실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벼슬에 나아가서는 더욱 정진하였으며, 모
든 성의를 다하여 부모를 섬겼다. 그가 더불어 벗으로 하는 이는 모
두 한때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평소 글 읽기를 좋아하여 퇴근하면 
책을 대하고 선현의 격언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특히 논어를 좋아
하였으며 경연에 나아가서는 강설(講說)을 정확히 하여 지론이 공
평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후 조정에서는 호성원종공신의 훈호를 추
록(追錄)하였다.

<참고:국조인물로, 한국인명대사전, 신도비명>,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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