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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鄭保)

<묘> 생몰미상. 조선 문신.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연일(延日), 포
은 정몽주의 손자. 종성(宗城)의 아들. 학문이 뛰어나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다. 젊어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사헌부감찰(司
憲府監察)이 되어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함께 벗으로 사귀었다. 
이때 사육신(死六臣)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분개하여 음식을 먹
지 않았다.
그의 서매(庶妹)가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누이
를 찾아보고 “명회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누이가 “대궐에서 죄
인들을 국문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내가 하는 말을 그에게 전하
라. 명회는 만세의 죄인이라 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한명회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왕에게 아뢰니 왕이 친히 그를 국문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나는 항상 성삼문, 박팽년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생
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수레에 깔려 죽게 하는 형벌(刑罰)에 처
하도록 명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저 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정
몽주의 손자”라고 대답하니 왕은 급히 명령을 내려 이를 중지시키
면서 이르기를 “충신의 후예는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하고는 마침
내 영일(迎日)로 유배하였다. 그러나 유사(有司)가 영일은 그의 관
향지이니 그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은 불가하다고 건의하여 다시 단
성(丹城)으로 옮기니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숙종 기미년(1679)에 단종(端宗)을 복위하고 사육신등 여러 사람들
을 정표할 때 그 역시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되었다. 그의 시신
은 포은 정몽주 묘소의 우측에 장례하니 부인의 묘소와 위 아래로 
나란히 더불어 있다. 그러나 봉작이 처음과 나중에 서로 달라 처음
에는 묘표를 6대손 주(周)가 세웠으나 그 후 66년 후인 신해년에 8
대손인 병사(兵使) 덕징(德徵)이 비석을 다시 세우고 삼주(三州) 선
생인 이재(李縡)가 음기를 짓고 명(銘)하였다.
삼주 이재는 보(保)의 외손이 되기도 한데 명(銘)하여 이르기를 <포
은의 손자며 6신의 벗이었다. 내 그의 비석에 글을 하니 백세토록 
그 이름 영원하리>라 하였다.

<참고:한국인명대사전, 묘갈>, 금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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