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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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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혜린(田惠麟)

<묘> 노녀의 스승으로부터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까 말
까한 천재」라는 격찬을 받았던 전혜린(전혜린)은 아깝게도 31세
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인(才人)은 단명(短命)하고, 미인
(美人)은 박명(薄命)하다던가?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
유를 갈망했던, 당대에 보기 드문 지성적 가인(佳人)은 그 꿈을 다 
피워보지도 못한 채 애석하게 져버렸다.
그녀가 평안남도 순천에서 전봉덕(田鳳德)씨의 1남 7년 중 장녀로 
태어난 것이 1934년. 법률가였던 아버지 역시 29세에 일본고등문관
시험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한 천재였다. 유복한 어린 시절의 혜린
은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한글과 일어를 배워 5세 무렵에 벌써 책을 
읽기 시작했다.
1953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격한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3학년 재학 중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고교시절 높은 학구열
로 함께 공부하며 작가를 지망했던 친구의 알선에 따라 독일로 유학
한 그녀는 자유와 낭만의 예술생활에 젊음을 보냈다.
1959년 독인 뮌헨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조교로 근무하
던 중 집안 간에 결혼할 것을 합의한 법학도 김철수(金哲洙)를 남편
으로 맞아 딸을 낳았다. 그래 5월 귀국하여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
대학교 법과대학, 이화여자대학교의 강사를 거쳐 1964년에는 성균
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으며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회의 위
원으로 위촉되어 일하기도 했다.
혜린은 종종 직업에 대한 혐오감을 일기에 적을 만큼 현실에 만족하
지 못했으나 연륜이 쌓일수록 직업의식이 강해져 강의준비와 청탁
원고 집필에 정열을 기울이는 면모를 보였다. 그러면서 독일 유학시
절부터 시작한 작품 번역에 틈나는 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번역 작품은 10여권에 이르는데 사강의 <어떤 미소>, 슈나벨의 <안
네프랑크-한 소녀가 걸어온 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게
스트어의 <화비안>,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빌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등이며 정확하고 분명한 문장력과 유려한 문체
의 흐름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외에도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제명으로 1976년 대문출판사에서 일기가 유
작집으로 출간되었는가 하면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와 <미래 완료의 시간 속에>가 발간되었다.
그녀가 번역을 시작한 동기는 남편 김철수의 권고 때문이지만 번역
이란 별 대단한 일이 못 된다는 생각에 그리 즐겨하지는 않았다. 그
러나 한국에서 출판이 결정, 소개되면서 모교 경기여고에서는 유학
중에 원작 못지않은 훌륭한 작품을 번역한 공로를 높이 사 「영매상
(英梅賞)」을 주었다. 이 상은 경기여고 출신 등 중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주는 권위 있는 상이다. 좋은 작품을 쓰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이 남달랐음에도 마음에 드는 글이 써지지 않는 자괴심
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일생에 한번, 단 하나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 살
아간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그러나 때로는 은빛 안개에 잠긴, 
낙엽이 깔린 아침 길과 같은, 또는 파란 하늘에 둥둥 분홍 구름이 
떠 있는 황혼과도 같은……. 이런 여러 개의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
되어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쉽지만도 또는 즐겁지만도 않다」라는 58
년 10월의 일기 한 부분이 그녀의 참담했던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작은 키에 검은 머릿결을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검은 머플러를 즐겨 
사용했던 검은 눈동자의 전혜린. 그녀는 한때 검은색의 옷차림을 유
행시키기도 했던 비운의 여인이었다.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밤사이
에 심장마비로 일생을 마감한 그녀는 시흥군 수암면 조남리에 묻혔
다가 84년 4월 22일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 천주교 공원묘지에 옮겨
졌다.

<참고:인물백과사전, 월간경기 3월호>,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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