¾ÆAIμð
비밀번호
로그인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사이트맵
찾아오시는 길
이메일보내기
문화원달력
조직도
홈 >향토문화자료관>향토위인

 

장욱진

이미지없음
 장욱진(張旭鎭)

<우거> 화가. 1918년 1월 8일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에
서 부친 기용(基용)과 모친 이기재(李基在)와의 사이에서 2남으로 
출생, 본관은 결성(結城)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두려운게 없다. 오래 사는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것이고 기능이 없으면 죽어 버리는게 좋다. 
내 기능은 그림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가지 그려야 한다”고 한 화가 
장욱진. 그러면서도 그림을 직업으로 그리지 않았던 그는 “나는 심
플하다”는 것을 생활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면서 평생에 그가 
지녔던 자부심을 온갖 궁벽속에서 “한번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리고 죄가 있다면 한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고 말한 그
는 미술은 취미도 열정도 아니고 그의 삶의 전부였고 그에게서 붓
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죽을 사람이라는 평
을 들었던 화가 장욱진. 그가 1986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 244번지
에 있는 한옥 한 채를 사서 보수하고 7월초에 입주해 살기 시작하였
으며 말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웃사람들은 당대에 이름있
는 중량급 화가가 곁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명성을 알지 못했으며, 
그 지역 주민들도 매한가지였다. 1922년 고향에서 서울 당주동으로 
이사하였고 1924년 경성사범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3학
년 때인 1926년 미술교사가 그림을 뽑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
교가 주최한 전국 소학교 미전에 보냈을 때 그 그림이 일등상을 차
지하였다. 1914년 4월 1일 사학자 이병도의 맏딸 순경(舜卿)과 결혼
한 후 일본에 유학하였고 1943년 국제미술학교를 졸업후 귀국하여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9개월 만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1954년 서울대학 미술대학 미술대우교수로 일을 시작하였으나 1960
년 본 대학을 사직하였고 경기도 덕소에서 조그마한 양옥을 짓고 생
활, 1977년 여름 양산 통도사에 들어가 삼소굴에서 칩거중이던 경봉
(鏡峰)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서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면 모든 
진리를 자유롭게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서 부처의 모습을 본다”는 선시를 짓고 경봉은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그후 수안보에 화실을 마련
하여 전원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1986년 수안보의 화실을 정리하
고 구성면 마북리에 있는 한옥을 사서 보수한 다음 7월초에 입주하
였고 말년의 작품생활을 하다가 1990년 12월 27일, 73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일을 하기 위하여 몸뚱아리는 소모해야 한다고 말하던 장욱진은 5
백여점의 유작을 남기고 한줌의 재가 되었다. 아직도 구성면 마북리
에는 그가 살던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덩그러니 전해지며, 미망인 이
순경여사가 지키고 있다.

<참고:장욱진 그사람, 김형국, 장욱진 그림산문집>, 이인영
    목록



 
주소 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