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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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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사용(崔士庸)

<묘> ?~단종원년(1453). 조선 문신. 자는 관중, 본관은 전주, 유경
(有慶)의 다섯째 아들. 어려서 천품이 단아하고 기상이 맑았으며 검
소하고 부지런하였다. 입학하여 학력이 일진하매 널리 보고 오래 기
억하였으며 물건을 가려서 상대하였다. 태종 13년(1413) 부친의 상
을 당하매 삭망으로 성묘하되 풍우에도 변함이 없었다. 세종원년
(1419)에 상의원 직장(直長)이 되고 경자년(1420)에는 실록청 당랑
(堂郞)으로 뽑히어 시강원으로 들어간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를 거쳐 송화현감으로 나아감에 먼저 교육에 힘썼으며, 신천고을과 
익산에서 선치(善治)하여 록피(鹿皮)를 은사(恩賜)받았다.
그 후 사헌부 감찰, 사복시정 병조와 형조 좌랑, 사헌부 집의(執義)
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조원(曺元)이라는 사람이 토지에 관한 송사
를 자기 고을의 원에게 제출하였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록 판결하여 
주지 않자 그는 “임금이 어두워 이러한 무리로 수령을 삼았다”고 
한 말이 나라에 알려져 그 죄를 다스리려고 하니, 이때 사용이 간하
기를 “비록 말이 불손하기는 하나 관원이 송사를 지체함을 분해한 
것이지 임금을 원망한 뜻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임금도 최사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 임금의 총애를 받는 궁녀가 정치에 간섭함
으로 이를 임금에게 직언하여 바람직하지 못함을 지적하자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그러하니 장성하면 그러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
였으나 곧 그를 멀리 하였다. 사용은 또 “관리가 요행히 승진하기만
을 바라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해치는 것이 되지 쉬우며, 재능을 시
험하지 아니하고 등용하는 것은 나라에서 사직을 중히 여기는 도리
가 아니라” 주장하였다. 그 후 다시 청송부사(淸松府使)와 밀양부사
를 거쳐 경술년(1430)에는 첨지중추부사로 1432년에는 상주목사가 
되었다가 과만으로 돌아오는 날에 백성들이 길을 막고 머물러 달라
고 하니 경상감사 이맹장이 나라에 보고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우러나지 않았다면 사람이 감동함이 이 같으랴>
고 하였다. 1453년 하세하니 용인현 자봉산 선영아래 장례하니 지금
의 기흥읍 공세리이다.

<참고:행강지, 전주최씨 세보>,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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