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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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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용(洪思容)

<출생> 본관이 남양(南陽)인 홍사용의 호는 노작(露雀), 소아(笑
啞), 백우(白牛) 등이 있지만 대부분 ‘노작’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용인군 기흥읍 농서리 용수골에서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부위
를 지낸 아버지 철유(哲裕)와 어머니 이한식(李韓植-韓山李氏)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서울 재동(齎
洞)으로 옮겨 자라다 9세 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화성군 동탄면 
덕우리로 내려와 휘문의숙(徽文義熟)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의 서
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살 위인 원씨(元氏)와 결혼하여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문학활동을 시작한 
것이 휘문의숙 시절부터이며 3학년 재학 중에 박종화(朴鍾和), 정지
현(鄭志鉉)등과 함께 시집 《피는 꽃》을 등사하여 발간하였다. 
1919년 휘문의숙 졸업과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체포된 적도 
있었으나 얼마 후 풀려났다.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청산백운)>과 시 <푸
른 언덕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 후일 공개
되었다.
1922년 재종형 사중(思中)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우리
나라 낭만주의의 기틀이라 할 수 있는 문예지 백조(白潮)와 사상지 
흑조(黑潮)를 기획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백조》만 3호까지 간행
하였다.
이상화(李相和), 박영희(朴英熙), 박종화(朴鍾和)등과 함께 《백
조》지를 발행하며 그의 시작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백조》지 창
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하나>를 비롯하여 <나
는 왕(王)이로소이다>, <묘장(墓場)>,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 등 20여편과 민요시 <각시풀>, <붉은 시름>등 수편 및 소설 <저
승길>, <뺑덕이네>, <봉화가 펴질 떄>, 희곡 <할미꽃>, <출가(出
家)>, <제석(除夕)> 외에도 수필과 평문이 실려 있다.
그 외에도 《개벽》, 《동명(東明)》, 《여시(如是)》, 《불교》, 
《삼천리》, 《매일신보(每日申報)》등에도 많은 시와 소설, 희곡 
등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백조》폐간이후에는 연극에도 몰두하
는 등 폭넓은 활동을 보여주었다.
1923년 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직을 맡았는가 하면 
1927년 박진(朴珍), 이소연(李素然)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였으며 1930년 홍해성(洪海星), 최승일(崔承一)과 함께 신흥
국장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낌없는 투자와 불같은 그의 열정
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거듭하여 마침내는 가산을 모두 탕진해버리
는 불운을 겪었다.
집안이 기울자 불교 쪽으로 관심을 돌려 불교잡지 《여시(如是)》
를 간행하게 되었으며 1928년 4월 불교사(佛敎社) 석가탄신 경축공
연에서 그 자신이 희곡<태자의 출가>를 직접 쓰고 출연하기도 했
다. 1929년 경 부터 친구 박진(朴珍)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 돌아와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차려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해방 전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희곡 <김옥균(金玉均)전>을 쓰다 
절필한 연유로 주거제한을 받는 수난을 겪었으며 이후 교편을 잡기
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 뒤 8.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
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한 채 지병인 폐질환으
로 1947년 눈을 감았다.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감을 
형상화한 초기의 사설적 장시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 민족관념
을 노래한 민요시로 구분된다.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그
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등 일현의 작품들은 장시를, 그리고 <봄
은 가더이다>, <해저문 나라에서> 등은 민요적 시라 할 수 있다.
시문학사적 위치로 볼 때 1920년대 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의 공적은 매우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서 보인 어머니와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등의 감상
적 색채는 그의 시적 특징이며, 그는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
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48세의 많지 않은 일생동안 예술활동을 위해 아낌없이 전 재산을 투
자했던 홍사용.
두주를 불사하면서도 남에게 취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만큼 곧은 
성격과 꺾임 없는 모습을 간직했던 그는 함께 문학활동의 길을 걸었
던 조지훈(趙芝薰), 박종화(朴鍾和) 등에게 흰 모자, 흰 옷, 흰 신을 
늘 착용한 깨끗한 멋쟁이로 회고되었다.
용인군 기흥읍 능서리에 그의 생가 중 안채가 아직 남아 있으며, 묘
소는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있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코 자기 작품을 활자화하지 않으려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생존 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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