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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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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구(韓用龜)

<묘> 영조 23(1747)~순조 28(1828) 조선 문신. 초명은 용구(용구),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 본관은 청주(淸州), 동지중추부사(同
知中樞府事) 후유(後裕)의 아들. 영조 49(1773)년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76년 주서(注書)가 되고 예조좌랑(禮曹
佐郞), 응교(應敎)를 역임, 1796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있다가 임
금을 모독했다는 죄로 삭주(削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그 후 대사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1799년 진하겸 사은부사(進
賀兼謝恩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1800년(순조 즉위) 예조판서에 
승진,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02년 전라도관찰사, 1805년 우의
정에 승진하고 1876년 죄인 김달순(金達淳)을 탄핵하는 대신(臺臣)
의 용어 속에 그와 영의정 서매수(徐邁修)를 공박하는 구절이 있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09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진하겸 사
은사(進賀兼謝恩府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서 1811년 약원도제
조(藥院都提調)를 겸했으며, 1812년 왕세자(王世子)가 책림되자 좌
의정 겸 세자부(世子傅)가 되었다. 1816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고 1821년 영의정에 승진하여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장례를 마친 
뒤 사직,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익정(翼貞)이
다. 그의 묘는 남사면 월곡마을 뒷산 임자좌에 있다.

<참고:용인군지, 한국인물대백과>, 금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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