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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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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린(孔瑞麟)

<출생>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희성(希
聖), 호는 휴암(休巖)이다.
1483년 의달(義達)의 아들로 태어나 24세되던 1507년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중종4년인 1509년 좌랑으로서 정전예연(正澱禮宴)에서 여악(女樂)
을 쓰지 말 것을 건의하였고, 사전체제(祀典體制)를 정비할 때 강경
서(康景敍)・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기신재(忌晨齋)혁파에 힘썼
다.
1511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수찬・사헌부장령을 역임
하기도 했다.
1516년 장령으로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
의 입후문제(立後問題)를 제기하였고, 이듬해 시강관(侍講官)으로 
경연에 참석하여 언로(言路)의 확장을 주장하였다.
1518년 ≪성리대전≫의 감독능력이 있는 인물로 선발되었으나 승지
로서 대간을 논박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1519년 좌승지로 다시 서용되었지만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부
터 친교가 있었던 조광조(趙光祖)등 사림파 인물과 함께 기묘사화
(己卯士禍)에 연루,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524년 남곤(南袞)의 주청으로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후 파주목
사・황해도관찰・대사헌・동지중추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품이 자상하고 온화하였으며 사림파의 무죄를 상소하다 누차 관
직을 삭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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