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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항

이미지없음
 김약항(金若恒)

<유허비 단>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살다간 문신이며 청백리
로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재(惕若齋)이
다. 고려 말 대내외적으로 국운이 어지럽게 되기 시작할 무렵인 
1353년(공민왕 2년)에 고려 보리공신 대광광성군(大匡光聖君) 김정
(金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영명하여 16세 때인 1368(공민왕 18년)에 병
신진사시(丙申進士試)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1371년(공민왕 2년)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김약항이 처음 벼슬한 것은 전교시(典
校時)에서 주부(注簿)로 차츰 승진하여 예의사(禮儀司) 총랑(摠郞)
이 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년)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재직하면
서 강직한 직언(直言)으로 항상 조정의 귀를 거슬려 오던 중 임금
의 뜻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외직(外職)으로 전보되어 황해도 지곡
주(知谷州)의 군사(郡事:郡守)로 좌천되는 징계를 당하였다.
1390년 10월 강원도 염문계묵사(廉問計黙使)가 되었다가 1392년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정씨는 고려의 
왕조는 서산마루에 걸친 해처럼 기울어가고 위하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李成桂)가 천하를 장악하자, 김약항은 극력 혁명을 반대하
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을 절감하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고
려 청신으로 서의 절의를 지키려 하였으나 태조 이성계의 수차에 걸
친 부탁(온 나라의 선배중 제일이라고 대접하며)으로 출사(出仕)하
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하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
임한 후 판전교시사(判典校時事)가 되었다.
1395년(태조 4년) 명나라에 들어가 억류된 사절 유순(柳珣)등을 송
환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길흉의 
일이 있을 때 아뢰는 四六體의 글)을 다른 중추원의 학사들과 함께 
지은 바 그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명나라에서는 글 지은 이들
을 압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에 다른 학사들은 화
를 모면키 위해 피신하였으나 김약항은 모든 학사들의 책임을 지고 
국가사직의 위난을 모면하기 위해 자진하여 명나라로 압송되어갔
다. 이때가 1395년 2월 15일이었다. 김약항은 명경(明京)에 가서도 
온갖 위협과 유혹, 악형과 고초에도 굽히지 않고 조국이 자주독립국
가임을 강조하고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위하여 조금도 굴함이 없었
으며, 마침내는 항변과 설득으로 일관한 나머지 그들을 감복케 하
여 무사하기에 이르러 국가의 위기를 해소케 하였다. 이때에 현지에
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해지기도 하였다. 그
러나 귀국치 못하고 다른 일로 다시 양자강(楊子江)유역으로 유배
되어 조국을 그리며 신음하다가 1397년 유재지에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여 이역의 고혼이 되었다.
김약항의 애국독립정신은 마침내 국내에까지 알려져 정종은 후부
(厚賻)를 내리고 남은 옷으로 예장(禮葬)을 치르도록 명을 내리는 
한편, 태종 때에는 권양촌(權陽村)의 건의로 정포은(鄭圃隱)과 동일
자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내리고 곧이어 청백리(淸白
吏)로 뽑혀 자손에게 수록령(收錄令)을 내리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군 모현면 일산리에 소재해 있다.
그가 남긴 시 중 명나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평안북도 안주의 객
관에서 국가흥망을 걱정하며 지은 시 1수를 소개한다.

여관이 어찌 그리 쓸쓸한가
바람결과 연시 빛은 저 들밖에 컴컴하구나
만리타국에 가는 객증인지라
심정도 몹시 좋지 못하고 피곤하여 잠깐 누웠더니
침상의 꿈의 혼도 깜짝 놀래지도다
땅이 궁벽하니 살고 있는 주민들도 얼마 안되고
일기가 저물어 가니 나는 새들만 지저귀누나
아무리 봄이 다시 돌아왔을지라도 타향이므로 짝이 없어
백가지 생각하면서 홀로 마루난간에 기대어 있노라

<참고문헌 : 高麗史, 王朝實錄>, 최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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