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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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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임(尹行恁)

<묘> 영조 38(1762)~순조 1(1801). 조선 문신. 자는 성보(聖甫), 호
는 석재(石齋)·방시한재(方是閑齋), 초명은 행임(行任). 용안군(龍
安君) 종주(宗柱)의 손자. 용은군(龍恩君) 염(琰)의 막내아들. 본관
은 남원(南原) 정조 6(172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벼슬에 등용되고 한림(翰林) 대교(待敎)를 거쳐 문
형(文衡)을 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이십도 안 된 나이에 벌써 저술
(著述)이 책상에 그득하였다. 그의 부친은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열 살에 부친이 별세
한 후 모친의 엄격한 학문의 독려를 받고 자랐다. 그가 선산부사로 
있는 장인을 문안하였을 때 그곳에서는 예부터 도깨비가 사람을 괴
롭히고 있었는데 행임이 글을 지어 잡귀가 물러가기를 빌었더니 괴
변이 끊기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
다.
1788년에 승정원 예속(隸屬)들이 싸운 일이 있었는데 이때 임금은 
하속들을 단속하지 못한 탓이라 하고 그 책임을 전에 주서(注書)로 
있던 사람에게도 있다 하여 그를 성환역(成歡驛)으로 귀양 보내도
록 하고 화공에게 명하여 그가 귀양길에 떠나는 모습을 그려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기호지방에 열병이 유행하여 임금은 즉시 그
의 귀양을 풀도록 하여 규장각 직각(直閣)으로 복직되었다.
무오년(1798)에 모친이 별세하였다. 그가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교
도(敎導)함을 받아 성취한 것은 모두 모친의 가르침이었음에 임금
께서도 그의 모친의 현숙(賢淑)하심을 생각하고 특별히 거마(車馬)
로 부의(賻儀)를 내리는 한편, 어필(御筆)로 묘지(墓誌)를 쓰기를 <
현숙태부인지장(賢淑太夫人之藏)>이라 하였다.
그의 기질은 맑고 순수하며 온화하고 자상하여 언제나 기쁜 모습을 
간직하였다. 남의 과실은 그것으로 해서 그 사람이 비난을 받을까 
덮어 주었고 남의 착한 행실은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지나칠
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 착한 행실을 선양(宣揚)하고 의(義)와 이
(利)를 반드시 분별하였다. 평생을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
의 맹지반(孟之反)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은 것과 송나라 사양
좌(謝良佐)가 자만심을 버리라고 한 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않
았다.
유고(遺稿)로 8책 16편과 동삼고(東三攷) 8권은 신라·백제·고구려
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완성하는 한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
書), 이충민공실기(李忠愍公實記)등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편찬하
였다. 그는 경전(經典)을 교정(校訂)하면서 그 보이는 바 뜻을 같이 
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 자신이 승복하고 승복하지 못할 것
을 논한 것이 무려 10책 21편이나 되었다. 이를 통틀어서 신호수필
(薪湖隨筆)이라 하였는데 훈고(訓詁)나 명의(名義)에 있어서도 정
(程), 주(朱)의 설을 준수하였고 채씨상서(蔡氏尙書)와 진순(陳淳)
의 예기 및 제가(諸家)의 주해(註解)는 그 오류를 분별하여 바로 잡
아서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하였다. 이치(理致)를 설명하
고 밝히는데도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견해가 많아 때로는 근세 중
국인과 경전을 이야기할 때 그 본래의 뜻이 우연히 합치하게 될지라
도 그것을 자기 수양의 도정(道程)으로 돌렸으며, 남이 보지 않는 
혼자만이 있을 때라도 자기 몸가짐에 신중을 기한다는 신독(愼獨)
에 충실하였으니 신독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하면서 이르기를 ‘나 같은 소자(小子)가 성현의 글
을 읽고 그것을 깊이 체득해 본받고 실천하지 못하니 참으로 자포자
기하는 것이라 하겠다고 하였고, 알면서 배우지 않는 것도 기만이
요, 배우고도 힘써 행하지 않는 것도 기만이다. 누구를 기만하는 것
이냐 하면 마음을 기만하고, 하늘을 기만하여, 선왕을 기만하는 것
이다“하였으며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기헌(弗欺軒)이라 
당호(堂號)하고 또 좌우명(座右銘)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1794년 정리사(整理使)가 되고 1800년 정조가 죽자 제술관(製述官)
으로서 왕의 시장(謚狀)을 썼다. 이해 순조가 즉위하자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어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이해에 정순왕후
가 시파를 추방하기 위하여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강진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전라도 관찰사에 기용
되었으나 척신 김조순의 상소로 투옥되어 참형을 당했다. 그의 묘소
는 구성면 창덕리에 있다.

<참고 : 한국민물대사전, 대방세가언행록>, 금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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