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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이미지없음
이한응(李漢應)

열사는 용인군 이동면 시미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종 11년(1874) 9월 21일 곤양군수 경호(璟鎬)의 아들이며, 한말
의 우국열사로서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며 본관은 전
의(全義)이다. 16세때 관림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1세 되던 고종31
년(1891)에는 성균관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재원이었다. 그의 나이 
28세 되는 광무 5년(1901) 3월 주한영국, 벨지움 양국 공사관의 참
사관(參奢官)으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소위 “고문정치”, “고
문외교”를 강제하는 협정이 있기 3년 전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형편
으로서는 이미 영, 미, 노, 일 등 열강의 세력들이 밀리고 서로 경쟁 
각축(角逐)하는 마당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는 시기였지만 그러한 
열강중의 한 나라인 영국에 주재하는 공사 관원의 한사람으로 나가 
있는 청년 외교관 이한응은 현지 외국의 발전상을 주의깊게 관찰하
고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공사 민영돈(閔
永敦)과 함께 조국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그의 성
실, 근면한 자기수양과 공무상의 노력을 진작부터 내외 인사의 칭찬
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즉 광무 6년에는 공사 민영돈의 귀국과 함께 특명 서
리(署理) 공사로서 복잡하고 중요한 대영 외고의 전 책임을 받게 되
었으며 다음해에는 다시 종래의 종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서 정3
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관계(官階)의 특별승진이 있을 정도였
다. 그러나 기울어져만 가는 대세를 일개 청년 외교관의 노력만으
로 돌이키기엔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서리 공사로 승진
되던 해 즉 1902년에는 일찍부터 아시아 강점의 야망을 갖고 있던 
영국과 일본이 서로 자기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영국은 청국
(淸國)에서 일본(日本)은 한국에서의 특수 권익을 인정하고 두나라 
중 어느 한 나라가 다른 한나라와 교전하는 경우에는 중립을 취하
고, 두나라 이상과 교전하게 되면 참전한다는 영.일공수동맹(攻守
同盟)의 조약을 보게 되었으며, 이 영.일동맹은 후에 다시 수정되
어 일본이 한국에서의 정치, 경계, 군사상의 지도감독 및 보호 등 조
치를 취하는 권리를 영국이 인정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기도 하였
다.
또 국내에서는 광무 8년에 노.일 개전과 함께 한국에서의 일본의 내
정간섭 및 군사활동의 자유를 인정하는 한.일 의정서가 성립될 만
큼 국세가 나날이 기울어져 갔다. 주영서리 공사 이한응은 이러한 
내외 정세를 밤낮으로 근심하고 또 거기에 관한 외신(外信)보도에 
신경을 날카롭게 하면서 국제 주요사건을 일지로 수록하고 유의 검
토하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정세가 불리해져 갈수록 한 
가닥의 혈로를 찾으려 피눈물 나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조국을 대
표해 나가있는 공사의 신분을 명심하면서 학문을 닦아 자신의 수양
을 쌓고 다른 나라 외교사절들과도 우호적인 교제를 하여 외교적 진
출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뒷날 그의 순절한 소식을 본국 정
부에 알리는 명예 총영사 영국인 마겐론의 아래와 같은 보고문의 일
정도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성실한 생활을 여실히 말해주는 일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공(李公)은 한국의 가장 공정한 대표자입니다.
그의 일상생활은 학문에 충실 근면한 모범적인 인물로서 영국에 주
재하는 동안에는 그의 지위를 잘 보전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영국
의 외무부나 일반 사회에서 그를 다른 여러 나라 대표들과 조금도 
차이 없이 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침략횡포는 나날이 더해가서 광무 8년 8월에는 이 나
라에 외교가 일본인이 추천한 외교고문에 의하여 운영하게 되고 모
든 외국과 외교관계 일체를 일본정부 측과 상의하여야 한다는 협정
서가 조인되고 뒤이어 9년 2월에는 다시 재외공사를 소환한다는 맹
랑한 조치까지 취하여지는 등 한국의 국제적 지위와 함께 재외 외교
관들의 면목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연거푸 일어나니 통탄할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여기서 이서리 공사는 다른 재외공사들과도 연락을 취해가며 그 대
책을 강구하여 보려고 애썼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침략국 일제의 횡포하에서 그해 3월에는 제1차로 주청(駐淸) 
공사관이 참서관(參署官) 1명 서기생(書記生) 1명만을 남기고 철수
하게 되었으며 뒤이어서는 이러한 외교관 소환 요구를 거부하던 참
정대신 민영환(閔永煥)이 의원면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
국 하와이에 있는 우리 이주 동포들을 보호 감독한다 하여 주한일
본 공사관이 추천한 주 하와이 일본총영사 재등간(齋虅幹)을 한국명
예 총영사로 임명한 것도 이무렵에 일이었다. 외교의 중임을 띠고 
수만리 이역에서 분투 노력하는 이공사에게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이 모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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