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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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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광(李紅光)

독립지사. 1910년 용인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홍광은 
고향에서 소학교 1학년을 마치고 극심한 가난과 일제의 폭압을 피
해 16세인 26년에 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했다.
그는 만 20세가 되는 30년에 중국 공산당과 조선독립군에 가입해 본
격적인 항일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동북지역에서 전설적인 항
일무장투쟁의 영웅이라 불리던 중국인 양정우(楊靖宇)를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32년의 일.
이홍광은 동북 항일연합군의 전신인 항일의용군과 반일산림대, 남
만주의 대표적인 항일무장 투쟁 세력인 「동북인민혁명군」창설의 
산파역할을 했다. 그는 또 혁명군의 제1군 1사장(師長)이란 중책을 
맡아 집안, 연변, 백두산등 동북지역의 일본군과 경찰을 습격, 일본 
관동군에 막대한 타격을 줬을 뿐 아니라 압록강을 건너 평북 동흥성
(현 후창군 동흥면)까지 진격해 일본인 상점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친일분자들을 응징,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그는 35
년 5월 남만주 홍경현 죽창동 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중 중상
을 입고 후송도중,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북 항일연합군은 31년 만주사변 뒤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들어서자 위기의식을 느낀 남만주 지역의 조선족과 한족, 일부 만주
족의 항일 유격대들이 양정우를 중심으로 규합해 무장투쟁세력을 
이뤘다.
구성원의 70%이상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합군은 35년 이
후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아 전체 11개 군으로 남.동.북만주에서 요
하지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44년 중.일전쟁 발발때까지 대일무장투
쟁을 계속했다.
이 같은 사실은 92년 7월 10일부터 8월 3일까지 북경대학 조선문화
연구소 초청으로 고구려, 발해 및 민족독립운동 유적조사를 위해 백
두산과 중국 동북지역을 답사하고 돌아온 京畿大 崔洪奎교수(53.한
국사)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최교수가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입
수한 자료는 중국내 조선민족 발자취 총서인 “결전”과 “불멸의 투
사”(이상 민족출판사刊)등 다수.
“결전”, “남만인민항일 투쟁사”는 동북지방에서 중국과 조선족 출신
이 이끈 단체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상을 각 부대별로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 “불멸의 투사”는 동북지역에서 항일유격대의 활
동이 본격화되는 1930~1940년까지 무장투쟁들의 일대기를 전기형
식으로 간결하게 소개한 책자다. 최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항일유격
대장 이홍광(李紅光)의 출생지는 용인군 이동면이다.
한편 국내 항일무장투쟁사 연구는 동북(東北) 항일연합군(抗日聯合
軍)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고 북한의 정권수립과 밀접하게 관련된 
관계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최교수는 “동북 항일
연합군에 참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함경, 평안도 출신인
데 비해 양정우(楊靖宇), 주보중(周保仲)과 더불어 연합군 3거두로 
꼽히는 경기.용인 출신 이홍광의 등장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참고 : 1992.8.16 중부일보(최영준)>, 금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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