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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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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원진(郭元振)

묘, 외사면 박곡리. 고려시대의 문신 호는 석천(石川), 시호는 문헌
(文獻), 본관은 현풍, 예부상서 돈효(敦孝)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
고 충렬왕 22년(1296)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의하여 원나라에 성절
사(聖節使)로 파견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는 좌대언(左代言)을 지냈다. 명신록(名臣綠)에
는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육경(六經)을 주석(註釋)했다고 한
다. 또 충숙왕 때에는 충효(忠孝)로 정려(旌閭)되었다. 기록을 보면 
여지승람에는 성균관 좨주로, 대동운옥(大東韻玉)에는 집현전제학
으로, 동사보감(東史寶鑑)에는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
한 것으로 나타나며 후에 포산군(苞山君)에 피봉되었다.
유원총보(類苑叢寶)에 전하기를 선생은 의협심이 강하며, 가난한 
사람의 구휼에 힘썼는데 태학(太學)에 있을 때 어떤 가난한 선비가 
찾아와서 조부(祖父)의 장례비 구하기를 청하니, 이를 동정하여 필
요한 물건을 주고, 선비의 성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이 도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은 덕행으로 세간의 칭송을 
들었고 관직도 현귀(顯貴)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묘소는 당초 방형분(方形墳)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고스란
히 유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묘제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클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손들이 본래의 분묘 규모가 조선시대 분묘와 상이하다 하
여 개장(開葬)한 후 유골을 이장(移葬), 원형분(圓形憤)으로 만들었
다. 그러면서도 본래의 분묘 형태를 별도로 유지시켜 온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며 14세기 즉, 고려 후기의 고분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
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묘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인명대사전>, 이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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